제 19화
(외전)그대가 떠나간 날, 사랑을 깨닫는다.
오늘 남편이 죽었다.
죽은 남편은 침대에서 자고 있다.
그의 뺨을 쓸어본다.
차갑다. 너무 차갑구나.
그의 머리를 쓸어본다.
하얗게 죽어버린 머리는 힘없이 흐트러진다.
항상 나에게 내밀던 손을 잡아본다.
거칠고 차갑구나.
그리도 따뜻하였는데, 이제는 시리도록 차갑구나.
잠들어 버린 그에게 비가 떨어진다.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져 스며든다.
비가 오는데 어찌 피하지 않는가.
그래, 그대는 언제나 비를 피하지 않았지.
비가 올 때마다 우산을 들고 와 나에게 씌워주고, 그대는 어깨를 적셨지.
그러면서 언제나 행복한 미소를 지었지. 지금은 그 미소가 보이지 않는구나.
항상 미소 짓던 그의 입술을 쓸어본다.
따스하고 부드러웠던 입술은, 이제는 차갑고 딱딱하구나.
그 입술이 지독히도 외로워 보여 입을 맞춰본다.
입을 맞출 때마다 느껴지던 그대의 따스함이, 그대의 심장 소리가, 그대의 호흡이 느껴지지 않는다.
당연한 것인데, 죽었으니 당연한 일인데... 나는 받아들이지 못하겠구나.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줄기가 굵어져 간다.
여기에 있으면 감기에 걸리니 집으로 돌아가자.
불러 보아도 움직이지 않는 그를 끌어안는다.
어찌 이리 가벼운가... 그대는 전사이지 않은가. 어째서 이리도 말라버렸나
일어나라! 다시 단련하자. 망가진 몸으론 힘들겠지만, 내가 도와줄 테니 일어나라.
제발... 제발 일어나란 말이다.
어째서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만 있나.
힘이 들어서 그러는가, 지쳐서 그러는가
무엇이 되었든 내가 도와줄 테니 한 번만 일어나라.
그대가 나를 도와주었던 것처럼 내가 도와줄 테니, 그만 장난치고 일어나라.
차가운 그는 일어나지 않는다. 내 말이면 무엇이든 들어주던 그는 일어나지 않는다.
아... 정말로, 정말로 가버렸구나. 그대는 떠나가 버렸구나.
그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어째서 지금은 이리도 아파오는가.
쓸모없는 감정들은 다 버리고, 잃어버렸건만. 왜 돌아와서 나를 아프게 하는가.
모르겠다. 모르겠다...
차라리 그대로 감정이 없었다면 아프지 않았을 텐데.
돌아온 감정으로부터 태어난 아픔이 나를 부수고, 처음 겪어 보는 이 아픔에 헤어나오지 못한 채 울기만 하는구나.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데,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은데... 너무 아파서 도저히 그대 곁을 떠나지 못하겠구나.
그 아픔을 속에서 떠나가 버린 그를 붙잡은 채 한참을 울었다.
“어머니... 시간이 됐습니다.”
뒤에서 들려오는 아들의 말에 눈물을 닦아내고, 조심스럽게 그를 품에 안아 든다.
“그래, 가자꾸나.”
눈가가 붉고 퉁퉁 부어서 엉망이 된 아이들과 함께, 그에게 작별을 고하러 간다.
그가 살아있을 때 좋아하던 정원으로 향한다.
그가 좋아하던 정원은 가신들과 사용인들로 가득 찼다. 중앙에는 검은 관이 놓여있고, 그 옆에 사제가 서 있었다.
차가워 보이는 관에 그를 눕히고, 조금 떨어진다.
사제는 그를 향해서 성호를 한 번 그리고, 기도를 올린다.
그 기도 소리는 청량했지만, 듣기 싫어 귀를 막았다.
듣기 싫은 기도 소리가 끝나고, 사제가 성호를 그리니 관에서 노란색 불길이 올라온다.
그가 원하던 방식이다.
시신을 불태우고, 타고 남은 뼛가루는 정원에 뿌려달라고...
그래... 그가 원했던 방식이다. 그가 원하던 대로 불타고 있다.
그대가... 불타고 있다.
불타고 있는 그대에게 다가간다.
그에게 다가가니 아들이 나를 붙잡는다.
“놔라.”
“어머니...”
“놓으란 말이다! 그가 불타고 있지 않느냐, 구해야 한단 말이다!”
딸이 와서 나를 끌어안는다. 아이들의 눈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그 모습을 보니 아파와서, 나 혼자서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아파와서, 아이들을 끌어안고 아픔을 흘려보낸다.
적막 했던 정원에 흐느낌 소리가 퍼져나간다. 흐느낌은 또 다른 흐느낌을 불러온다.
그렇게 정원은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흐느끼는 소리가 가득 차올랐다.
시간이 흘러 흐느낌 소리에 묻혔던, 타들어 가는 소리가 사라졌다.
사제는 나에게 작은 항아리를 내민다.
받아들은 항아리는 너무나 가벼우면서, 그가 담겨있기에 너무나 무거웠다.
그를 소중히 들고서, 그가 가꾸던 꽃밭으로 걸어간다.
흐느낌을 밟으면서 걸어가 도착한 꽃밭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흔적조차 남지 않은 꽃밭에 그를 뿌려야 한다...
손이 떨려온다.
떨려오는 손을 아이들이 붙잡아 준다. 붙잡은 아이들의 손에서도 떨림이 느껴진다.
우리는 떨리는 손으로 그를 손에 담는다. 그를 손에 담아 그를 느껴본다.
너무나 가볍다. 한 사람이 떠나가고 남은 마지막 한 줌이, 손에 있다고 느끼지 못한 만큼 가볍다.
그 느낌이 너무나 싫으면서도, 놓치기 싫어 손을 쥔다.
손을 쥐었지만, 바람이 불어오며 나의 손에서 그가 빠져나간다. 바람을 타고 그가 빠져나가는 것만, 떠나가는 모습이 너무나 작아서 보이지 않는다.
그와의 작별이 너무나 허무해서 아파온다.
아파오지만, 떠나보내야 하기에 쥐었던 손을 편다. 남아있던 그가 바람을 타고 떠나간다.
나의 손에 한 줌도 남지 않고 떠나간다. 그는 우리에게서 떠나갔다.
그를 떠나보냈으니, 돌아가야 한다.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런데, 발이 떨어지지 않는구나.
한참을 그곳에서 떠나간 자리를 지켜보다가 집무실로 돌아왔다.
보좌관들이 제발 쉬라고 사정했지만, 나는 가주니까, 브란트라는 이름을 짊어졌으니까. 쉴 수 없다. 쉬어서는 안 된다.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렇게 마음을 굳히고 서류를 보지만,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구나.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멍하니 허공만을 쳐다본다.
또 눈물이 흐른다. 그를 떠나보내었건만 아픔은 사라지지 않고 더 커져만 간다.
이대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집무실에서 뛰쳐나온다.
아무 생각 없이 달리다 보니 별채로 쫓겨나기 전에 그가 쓰던 방이 나왔다.
문을 열고 그 방으로 들어간다.
오랫동안 그가 없었지만, 그 방은 그의 흔적들로 가득했다.
그 흔적들 중에서 그가 즐겨 마시던 술이 눈에 띈다. 술을 마시면 괴로움이 줄어든다던, 그의 말이 생각나 입에 털어 넣는다.
목구멍이 뜨겁고 따갑다. 그 느낌이 끔찍했지만, 미칠 듯한 아픔을 줄일 수만 있다면 괜찮다.
술을 모조리 털어 넣으니, 술기운이 올라온다.
술기운이 올라오지만 아픔은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눈물이 더 많이 흘러내린다.
술기운에 몸을 맡기고 한참을 울고 나니 조금, 아주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그런 나의 눈에 초상화가 보인다. 그의 부탁으로 그렸던 가족 초상화가.
아이들이 어릴 적이라 자그마한 아이들, 아이들을 품에 안은 그와, 무표정한 내가 그려진 초상화가...
초상화 속의 젊은 그의 모습을 보니, 그와의 만남이 떠오른다.
첫 만남에서 긴장해서 말을 더듬던 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그 모습이 얼마나 웃겼는지...
그렇게 긴장한 그에게 나는 검을 던져주었고, 대련했지.
검을 뽑아 드니 긴장한 모습은 사라지고, 진중해진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검을 맞대면서 빛나던 눈이 나쁘지 않았다. 패배가 눈앞에 다가왔음에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대련이 끝나고 웃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감정은 짐이고, 약점이라 배웠기에 그 마음을 무시했다. 그저 ‘나쁘지 않았다.’ 그 한마디로 끝냈다.
다음에 만났을 때, 그의 실력은 많이 늘었다. 자신을 채찍질하며 부단히 단련한 것이 느껴져 마음에 들었다.
결혼을 하고, 자신이 배울 점이 있다면 누구에게나 배움을 구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아랫사람들의 잘못을 꾸짖지 않고 자신의 탓으로 돌리면서도, 규율을 중시하던 그가 마음에 들었다.
가만히 있어도 되는 입장임에도, 부단히 수련하고, 야만인을 토벌할 때 가장 앞장서서 물러나지 않는 모습이 좋았다.
몸을 사리지 않아 다치는 모습을 보면 신경 쓰였다. 야만인을 죽이고 죄책감을 느끼던 그의 모습이 신경 쓰였다.
그가 신경이 쓰였지만, 그가 마음에 들었지만, 그가 좋았지만 짊어진 것이 무겁기에, 약점이 될 수 있기에 그 감정을 버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에반이 태어났다. 배가 찢어지는 아픔 속에서 태어난 아이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우며, 곧 어미의 사랑조차 받지 못할 그 아이가 가여웠다.
에반이 태어나고 저주는 완전히 나를 잠식했다. 마음이 편해졌다. 더 이상 감정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렇게 빛바랜 세상을 살았다. 시간이 흘러 아이들에게도 저주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내가 아버님에게 들었던 말들을 아이들에게 주입시켰다.
감정은 쓸모없다. 무가치하다. 약점일 뿐이다. 어차피 사라질 것이다.
아이들은 그 말들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받아들였다.
그 이후로 조금 시간이 흐르고, 그는 더 이상 훈련을 하지 않고, 서고에 박혀 살았다. 그리고는 어느 날 「내가 반드시 저주를 풀어줄게.」 그 말이 적힌 편지를 남기고는 세상을 떠돌기 시작했다.
다시 생각해도 참으로 미련한 남자다. 무엇이 그리 좋다고, 감정을 잃어버린 우리가 무엇이 좋다고, 그렇게 신경 쓰는가.
그렇게 미련한 남자는 온갖 방법들을 시도하고, 실패하고도 포기하지 않았다. 지치고 힘들었을 텐데도 포기하지 않았다.
매번 다치고 오는 모습이 미련해 보여 그를 별관에 가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오늘을 맞이했다.
그리고 오늘이 되어서야 그의 사랑을 알았다. 잃어버렸던 나의 마음을 알았다.
아무리 힘들고, 아프더라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던 그의 사랑이 너무 아프다.
무시하고, 지워버리고, 잃어버렸던 나의 마음이 사랑이었음을 알았기에 너무 아프다.
그렇게 아픔에 몸부림치고, 그리움이 찾아왔다. 후회가 찾아왔다.
그의 온기가 그립다. 그의 웃음이 그립다. 그의 사랑이 그립다. 나의 삶에 너무나 깊게 스며든 그가 그립다.
그에게 느낌 감정들을 인정해야 했었는데, 그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해야 했는데, 그의 아픔을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너무 늦어버렸구나.
그리움과 후회 속에서 뒤늦게 그의 이름을 부르짖는다.
그가 떠나간 날, 그의 흔적에서 그를 찾아 부르짖는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그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그 사실이 나의 목을 졸라오고, 그리움과 후회가 더욱 커져간다.
그런 감정을 견딜 수 없어, 그가 살았던 별채를 찾아간다.
차갑고, 적막한 별채에서 그의 온기를 찾는다.
이곳에 그의 온기는 없다.
그 사실이 너무나 추워서, 그가 남긴 마지막 글을 다시 바라본다.
「사랑하는 아이리스, 에반, 엘리에게
내 삶은 여기서 끝나기에 하고 싶은 말들을 적는다.
내 삶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아이리스 당신을 만난 날, 당신과 결혼한 날, 에반이 태어난 날, 엘리가 태어난 날 그날들만큼 행복한 날이 없었다.
그 이후로 안 좋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날들이 있었기에 나는 힘을 낼 수 있었다.
지금도 그날들을 생각하면 행복하단다. 그러니 나를 불쌍히 여기지 말아다오. 나에게 미안함을 느끼지 말아다오.
저주 때문에 못 느끼겠지만, 그래도 말해보고 싶었다. 기적이 일어나서 너희들이 슬퍼할 날을 그리며 희망을 적어보았다.
그럴 일이 일어나지 않음을 알지만, 희망을 놓을 수 없더구나.
이런 미련하고, 바보 같은 남편이라서, 아비라서 미안하구나. 그리고 사랑한다.
죽어서도 너희의 저주가 풀리고, 봄이 찾아와 너희들이 행복해지기를 기도하마.」
미련하고, 바보 같은 남자의 말이 너무나도 아파서 나를 또 울리는구나...
어떻게 불쌍히 여기지 말란 말인가.
어떻게 미안함을 가지지 말란 말인가.
어떻게 당신 없는 세상에 봄이 찾아온단 말인가.
어떻게... 그대 없이 행복하란 말인가.
제발 그런 말 하지 말아다오. 마지막만큼은 그저 당신의 행복만을 생각해다오. 제발...
만약에 다음 삶이 있다면 이 미련하고, 바보 같고, 사랑스러운 남자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사랑을 깨달은 날, 그의 행복을 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제 작품을 봐주신 [독자 닉네임 출력]님 감사합니다!
연참을 하고 싶은데, 비축분이 없어서 힘드네요. ㅠㅠ
aghad121님 5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