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화
대사제
무르익은 봄은 떠나기 위해 화려한 옷을 벗을 때쯤 제국의 영토를 벗어날 수 있었다. 영토를 벗어나고 일주일이 흐르고,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남부의 들판을 걷는다.
남부의 덥고 습한 기후와 한층 달궈진 햇볕이 만나 몸의 활기를 조금씩 갉아 먹는다. 이마를 적시는 땀을 훔쳐낼 때마다, 마지막으로 들린 마을에 두고 온 말들과 마차가 간절히 생각난다.
계속 생각난다고 해도 별수 없다. 남부 특유의 환경과 독을 머금은 벌레들 때문에, 다시 데려와도 얼마 안 가 죽기에 쓸모는 없을 것이다.
“형제님 조금만 더 가면 숲이 나올 거예요.”
“그래그래.”
어제 야영을 할 때부터 들었던 말이지만, 눈에는 숲이라고 할 만한 무언가는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말이 의심이 가지만, 믿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참고 묵묵히 발을 움직인다.
한참을 걷고 머리 위에 있던 태양이 기울어져 갈 때쯤 앞장서서 걷던 그녀가 멈춰 선다.
“형제님 도착했어요.”
그녀가 도착했다고 말하지만 눈앞에는 평야만이 펼쳐져있다.
“음. 언제부터 평야가 숲이 됐니?”
“야 형제님 눈에는 안 보이시죠?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그녀는 품속에서 특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 돌을 꺼내서는 허공에 들이민다. 돌이 닿은 허공은 일렁이더니 틈이 생겨나고, 그곳으로 그녀가 들어가며 손짓한다.
“형제님 따라 들어오시면 돼요.”
그녀의 말에 틈으로 따라 들어간다. 풍경이 변하여 아무것도 없던 들판은 사라지고 울창한 숲이 펼쳐진다. 뜨거운 태양은 없어지고, 서늘한 기후와 은은한 빛만이 숲을 맴돈다.
이곳은 저번 삶에서 본 저주받은 정원과는 다르다. 그곳은 이곳처럼 숨겨져 있지 않았다. 이렇게 다른 세상과 같이 변하지 않았다. 저번 삶에서 봤던 모습과는 다른 이 숲이 조금 꺼림직해진다.
“카이안님의 정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형제님.”
그녀는 웃으며 나를 반긴다.
“여기는 마치 다른 세상 같구나.”
“대사제님이 받은 축복으로 숲과 바깥세상을 분리해서 그래요”
“그게 가능한 일인가?”
“네! 대신에 대사제님은 여기서 못 나가시지만요.”
그녀는 내뱉은 실로 터무니없는 말 덕분에 방금 품은 의문이 해결됐다. 내가 봤던 저주받은 정원에는 대사제라는 자는 없었으리라.
“대사제님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
“음. 대사제님처럼 오래 사신 분들은 나이 같은 건 잘 안 세셔서 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지만, 동족 중에서는 대사제님이 가장 오래 사셨어요.”
“그렇군.”
그녀의 말에 반쯤 확신을 하게 되었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대사제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대사제가 살아있을 때 찾아왔다는 사실이 다행이면서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조급해진다.
“조금 서둘러서 가자.”
“네!”
우리는 발걸음 속도를 높이고 숲을 해쳐나간다. 무서울 만큼 고요한 숲을 어느 정도 걷자,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고 레이첼이 달려 나간다.
“대사제님! 저 왔어요.”
그녀의 활기찬 목소리가 숲을 울리고, 뒤를 이어서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숲에 퍼져나간다.
“그래 돌아왔구나. 고생했다.”
다크엘프임을 나타내는 뾰족한 귀와 구릿빛 피부, 그리고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대사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대사제는 영원한 젊음의 축복을 받은 다크엘프임이 분명한데, 어째서인지 그는 삶의 끝을 달려가는 노인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노인은 레이첼이 인사를 다 나누고 나서 나를 쳐다보고는 미소를 짓는다.
“어서 오게나. 알릭”
대사제의 입에서 나의 이름이 나와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저를 아십니까?”
“물론이지. 카이안님께서 알려 주셨지. 자세한 이야기는 성지에 가서 하지.”
그 말을 끝으로 대사제가 허공에 손을 휘저으니, 숲에 빽빽하게 자라난 나무들이 이동하며 길이 열린다. 그 신비하면서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눈을 의심한다.
“따라오게나.”
대사제의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한 말에 몸이 저절로 움직이고, 먼저 가고 있는 대사제의 뒤를 따라간다. 대사제의 느긋한 걸음걸이를 따라가니 이상하게도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나니 숲의 끝이 보인다.
숲의 끝에는 흰 돌로 지어진 큰 건물 하나와 나무로 지어진 가옥들이 펼쳐진다. 그 마을에는 해는 없지만, 은은한 빛이 하늘에서 내려와 마을을 비추어 어둡지는 않았다.
“성지 바이샬에 온 것을 환영하네.”
대사제는 그리 말하고는 휘파람을 한번 분다. 조금 지나니 검은색 가죽옷을 입은 다크엘프 무리가 우리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인다.
“대사제님 오셨습니까?”
“그래. 내가 잠깐 비운 사이 무슨 일 있었나?”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대사제는 무리의 앞에 선 남자의 말에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나에게 손짓을 한다. 그 손짓에 나는 그에게 다가간다.
“이 자는 카이안님의 축복과 관심을 받고 있는 자이니 무례를 범하지 말게나.”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이곳에 머무를 것이니 그리 알고들 있게나.”
“알겠습니다.”
“다른 이들에게도 전달해주고 볼일들 보게.”
대사제의 말이 끝나고 다크엘프들은 빠르게 흩어졌다.
“오느라 고생했을 레이첼은 잠시 쉬고, 자네는 나를 따라오게나. 하고 싶은 말이 많지 않은가?”
“네.”
나에 대해서 이상하리만큼 잘 알고 있는 대사제를 따라서 처음에 보았던 석조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석조 건물 안에는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구체들이 떠돌아다니며 안을 밝히고, 양쪽 벽면은 주변은 거대한 도서관처럼 책들이 꽂혀있다. 그리고 정면은 특이한 짐승 석상 두 개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약간 신비로우면서 특이한 곳을 눈으로 훑어보고 있을 때, 대사제가 손을 한번 휘저으니 어디선가 나무 탁자와 의자 3개, 그리고 잔과 주전자가 날아와서 눈앞에 놓인다.
숲에서도 그랬지만 보면 볼수록 대사제를 가늠할 수 없다. 이 넓은 숲을 세상에서 분리시키고, 손짓을 하니 숲이 갈라져 길을 만들고,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한 음성에는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그런 힘을 가졌음에도 그에게 받은 느낌은 특이했다. 세상의 강자들과 제국 최강의 검이자, 장인이었던 윌리엄 브란트에게서 받은 느낌과는 전혀 다르다. 그들을 마주했을 때는 오금이 저리고 본능이 미친 듯이 경고를 했다.
반면 그를 만났을 때는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상식의 범주를 넘어선 힘을 보았음에도, 그저 신비하다는 생각과 함께 그것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반항조차 할 수 없는 강자를 만날 때마다 발작하던 본능은 순한 양처럼 잠잠하다.
그런 가늠할 수 없는 자는 주전자를 한 번 흔들고 잔에 푸른색 음료를 따르고, 잔을 넘겨준다.
“한잔하면서 이야기하지.”
그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 와중에도, 몸은 그의 목소리에 반응하여 움직인다. 달콤한 향이 나는 푸른 음료가 입안에 들어오자 부드러운 단맛이 피어나고, 마음이 차분해진다.
음료를 마시는 소리만 퍼져나가고 잠깐의 침묵이 찾아온다. 그 잠깐 찾아온 정적은 그의 목소리에 의해서 사라진다.
“그래 오는 동안 불편한 건 없었나?”
“불편한 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만.”
그렇게 말한 그는 음료로 입을 축이고 말을 이어간다.
“그대가 여기에 온 이유는 알고 있네. 하고 싶은 말들도 무엇인지 짐작하고 있네.”
“그러면”
말을 하다가 그의 손짓에 입이 다물어진다.
“이야기는 끝까지 듣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하고 싶은 말들에 모두 답변해 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네.”
그 말에 인상이 찌푸려진다. 눈앞에 해답이 있음에도 알 수 없다는 사실에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너무 그런 표정은 짓지 말게나. 답변할 수 없는 건 자네 때문에 그런 것이니까 말이야.”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 때문이라는 말에 원인을 짐작할 수 없었다.
“내가 자네에게 질문들에 대해서 답변하는 것도 축복으로 취급되네. 그런데 자네는 이미 너무 큰 축복을 받아서 축복이 들어갈 만한 자리가 없네.”
그 말에 입술을 씹는다. 그의 말이 맞다. 삶을 되돌리고 다시 한번 기회를 얻었는데, 그보다 더한 축복이 어디 있겠는가.
그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기회가 다시 주어졌음에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 속이 문드러진다.
“그래도 아무것도 도와주지 못하는 건 아니네. 그랬으면, 카이안님께서 나에게 자네에 대해서 말해주시지도 않았겠지.”
그의 말에 희망 한 조각이 피어난다.
나에게 희망을 보여준 그는 허공에 손짓을 하니 벽에 꽂혀있던 책들 몇 권이 날아온다.
“이 책들이 자네에게 도움이 될 거라네.”
그가 넘겨준 낡은 책들을 살펴본다. 그중에서 한 권의 제목이 나의 시선을 빼앗고, 심장이 요동치게 만들었다.
「데니엘 브란트」
제국의 개국 공신이자, 브란트 공작가의 초대 가주의 이름이 적힌 낡은 책이 작디작은 희망에 힘을 더해준다.
“이곳에 얼마든지 머물게나.”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에 나의 의지를 담아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삶의 끝에서도 찾지 못한 희망, 그 희망을 붙잡기 위한 나날이 시작되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순애 엔딩의 스포를 보기 싫으신 분들은 읽지 말아 주세요. 이번화의 댓글도 읽지 말아 주세요.*
댓글들을 읽어보면서 많은 생각들을 했습니다.
제가 순애 엔딩에 대해서 확답을 하면, 독자님들의 흥미와 재미가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래도 충분히 오해할만한 소지를 두고 쓰고 싶지 않아서 적어 봅니다.
저는 주인공이 아이리스와 이어지는 것을 목표로 두고 쓸 생각입니다.
그 과정이 좀 길고 느릿하여도, 행복한 끝을 보고 싶습니다. 주인공에게 봄을 선물해 주고 싶습니다.
그 봄이 찾아온 날, 이야기의 끝에서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싶습니다.
작가의 넋두리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적었던 것들은 스토리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가독성과 전달력을 위해서 수정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부족한 제 작품을 봐주신 [독자 닉네임 출력]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