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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하여 아팠다-16화 (16/59)

제 16화

여행

어둠이 푸른 색채를 머금기 시작하는 새벽, 남부로 떠나기 전에 나의 상태를 점검한다.

무투대회에서 얻은 영약으로 풍족하다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적다고는 볼 수 없는 양의 마나가 몸에 자리를 잡았고. 제대로 닦여있지 않았던, 몸속에 있던 마나가 다니는 길은 평탄해진 흙길 정도까지는 정비되었다.

상처투성이로 쓰러졌던 육신은 당일 날 신관의 치유를 받고, 충분한 휴식으로 활기를 되찾았으니 문제는 없다.

지금 상태가 객관적으로 남부를 안전하게 다닐만한 무력은 아니지만, 레이첼이 있으니 괜찮을 거다. 그녀는 남부 깊숙한 수림에 사는 다크엘프니 안전한 길도 잘 알고 있을 것이고, 무력도 지금 상태의 나보다 약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무투대회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그녀가 적당히 봐주면서 하다가 당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다크엘프들 특유의 음습함이 느껴지지만, 지금은 나를 도와주는 입장이니 든든하기만 하다.

“형제님 준비 다 되셨어요?”

문을 너머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녀가 왔으니 생각은 그만두고, 옆에 둔 배낭을 챙겨 들고 방에서 나간다.

“그래 다했다. 너는 준비 다 했나?”

“그럼요!”

로브와 복면으로 꽁꽁 싸맨 그녀가 활기차게 대답한다.

“그러면 가지.”

“네!”

흥얼거리는 그녀와 함께 밖으로 나가 사용인들이 준비해둔 투박한 짐마차에 짐을 싣고, 마부 자리로 이동한다. 레이첼은 마차 안으로 가지 않고 내 옆자리에 앉는다.

“여기보다는 마차 안이 편할 텐데.”

“그러는 것보다는 옆에서 이야기하는 편이 즐겁잖아요.”

아이처럼 들떠있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고, 고삐를 당겨 출발했다. 약간의 진동과 말들의 투레질 소리와 함께 마차가 나아간다.

아직은 이른 새벽이라,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기에 속도를 조금 낸다. 새벽의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과 흥얼거리는 그녀의 콧노래를 들으며 수도 밖으로 빠져나간다.

밖으로 나오자 그녀는 얼굴을 가리던 로브와 복면을 벗는다.

“드디어 밖으로 나왔네요.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들 사는 곳은 너무 넓은 거 같아요.”

“여기만 이 정도로 넓은 거지 다른 곳은 이 정도 까지는 아니다.”

“그래요? 저는 여기 말고는 가본 적이 없어서 몰랐어요.”

그 말에 귀를 의심했다. 다크엘프들이 있는 남부에서 수도까지 거리가 한 달 가까이 걸리는데, 사람이 사는 곳은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되어 그녀에게 되물었다.

“여기가 처음이라고?”

“네!”

“그러면 여기 올 때는 어떻게 왔는데?”

“어 그냥 대사제님이 알려 주신 방향으로 쭉 가니까 나오던데요.”

해맑게 말하는 모습에 말문이 막힌다. 말하고 싶은 것들이 아우성을 치지만, 배타적이고 음습한 그들에게 무엇을 바라겠는가. 말하고 싶은 것들을 삼키고, 조용히 입을 다문다.

“아 그리고 누군가랑 여행하는 것도 처음이에요. 그래서 엄청 기대돼요.”

그 말이 어째서인지 마음에 스며들고, 아이 같은 그녀의 모습에 아이들이 생각난다. 그래서인지 말이 조금 부드럽게 나온다.

“나도 처음이란다.”

“정말요? 형제님은 부리는 사람도 많고 엄청 큰 집에서 살아서, 많이 다니셨을 것 같았는데 의외네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하는 말에 웃음이 나온다.

“부리는 사람이 많고, 큰 집에 살아도 여행을 다닐 만큼 자유롭게 살지는 않았거든.”

“그래요? 아무튼 저희 둘 다 처음인 거네요.”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기뻐하는 티를 낸다.

“그렇게 좋으냐?”

“네! 같이 새로운 경험을 해보는 건 즐겁잖아요.”

“그래. 그렇지.”

나는 그런 경험이 없어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긍정을 해준다.

“그건 그렇고, 마을에 간다면 주의해야 할 점이라도 있나?”

“음. 보통 사람들이면 눈에 띄는 것만으로 공격부터 문제지만, 형제님은 괜찮을 거예요.”

“네 옆에 있어서 그런가?”

“그건 아니에요. 동족을 포로로 삼거나 협박해서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어서, 옆에 동족이 있더라도 먼저 공격은 하고 봐요.”

다크엘프의 상상을 초월하는 배타성에 대해서 들을 때마다 어지러워진다.

“그런데, 난 왜 괜찮지?”

“그건 형제님이 특별해서 그래요.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도, 카이안님의 축복이 느껴질 정도라서 다들 알아볼걸요.”

다행이면서 불행한 소식이었다. 오해받고 공격받을 일은 없어졌지만, 그 정도로 큰 축복이라면 회귀 말고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상식에서 벗어난 축복의 대가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면 나 정도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 있나?”

“음. 대사제님 말고는 본 적이 없어요.”

“그 대사제님은 무엇을 대가로 바쳤지?”

“대사제님은 삶 그 자체가 대가에요.”

그 말에 숨이 막혀온다.

삶 자체가 대가인 사람과 비슷할 정도의 축복이라면, 나는 무엇을 대가로 바치게 될 것인가.

“아 오해하지는 마세요. 대사제님의 삶이 대가라고 말한 건, 평생을 카이안님을 신실하게 모신 대가로 축복을 받은 거라 그래요.”

그 말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지만, 너무 조금이라 의미는 없어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은 막지 못했다.

평생을 카이안을 모시고 사는 삶이라... 그녀와 나의 아이들에게서 감정을 가져갔을지도 모를 신을 저주하면 저주했지, 어떻게 신실하게 믿으며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입안이 쓰라려 온다.

“그 형제님. 제가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큰 대가는 가져가지 않으실 거예요.”

확연하게 어두워진 나를 보고 그녀는 위로를 해온다.

“카이안님이 특이한 신이시지만, 많이 자비로우신 분이세요. 감당하지 못할 시련과 대가를 치르게 하시는 분은 아니에요.”

그녀는 열심히 말해보았지만, 쉽사리 믿어지지는 않았다.

감정을 가져가는 것이 어찌 자비롭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 생각하기에 믿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위로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그녀를 보고 억지로 웃어본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그렇다니까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여행이나 즐기자고요.”

“여행이라 부르기 좀 그렇지만 그러자.”

억지로 웃으며 조잘거리는 그녀의 이야기를 받아준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점심을 건량으로 마차에서 간단히 먹고, 다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세상은 붉어져 온다. 곧 밤이 찾아올 시간이니 평평한 곳에서 마차를 세운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을 하자.”

“네!”

그녀는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리고는 나를 쳐다본다.

“형제님 뭘 준비하면 되요?”

“불을 지피게 나무를 좀 구해와라.”

“네.”

그녀는 대답을 하고는 단검을 꺼내들어 오러를 두르고는 옆에 있는 나무를 베어낸다. 그녀의 동작에 나무의 가지는 쳐내지고, 쓰기 좋은 장작들이 만들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생기는 의문을 내뱉는다.

“엘프들은 나무도 생명이 있다면서 나뭇가지만 꺾어도 난리를 치는데, 너네는 그런 거 없나?”

“그런 재수 없는 놈들이랑 비교하지 마세요! 저희는 그렇게 고지식하지 않아요.”

엘프랑 비교하니 격렬한 반응을 보이기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제님이라도 봐 드릴 수 없는 게 있어요.”

“알았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을게.”

“이번만 넘어가 드릴게요. 그래서 다음은 뭐 하면 돼요?”

“아까 지나쳤던 냇가에서 물 좀 받아와라.”

“네.”

그녀가 물통들을 챙겨서 떠난 뒤 마차에서 야영 도구를 꺼내서 야영을 준비한다. 땅을 고르고 그 위에 텐트를 친 다음, 그녀가 만든 장작에 불을 붙인다.

점심은 간단히 건량으로 때웠으니 저녁은 제대로 먹기 위해서, 솥을 불 위에 걸어두고 귀한 버터를 살짝 녹인 다음 물과 밀가루를 넣고, 조금 가져온 야채와 고기를 집어넣는다.

“뭐 하시는 거예요?”

“스튜 끓인다.”

물을 떠 온 그녀가 내 옆에 앉는다.

“요리도 할 줄 아세요?”

“간단한 건 할 줄 알지.”

“대단하시네요. 전 요리만 하면 태워 먹기만 하는데.”

“처음이면 다 그런 거지.”

“여러 번 해봐도 그런데.”

그렇게 그녀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스튜에서 위장을 자극하는 냄새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엄청 좋은 냄새네요. 배고픈데 언제 완성돼요?”

“조금만 더 기다려라.”

그 말에도 계속 배고프다고 보채는 그녀를 무시하고 스튜를 끓인다. 붉은 세상이 완전히 어두워졌을 때 스튜가 담긴 솥을 불에서 꺼내고, 그릇에 담아서 그녀에게 넘겨준다.

“잘 먹겠습니다!”

그녀는 그릇을 받고는 허겁지겁 먹고는 다시 그릇을 내민다.

“더 주세요.”

그 모습에 웃음이 나올 것 같으면서도, 아이들이 모습이 떠올라 웃지는 못했다. 그런 복잡한 기분으로 스튜를 삼킨다.

“형제님 진짜 맛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더 퍼다 먹는 그녀를 보니 결국에는 웃음이 새어 나온다. 한 번 웃음을 털어내고 다시 식사를 한다.

그녀가 먹는 소리만 퍼지는 식사 시간이 지나가고, 달이 무르익은 시간이 찾아왔다.

“내가 먼저 불침번을 설 테니 먼저 자라.”

“네.”

그녀는 텐트에 들어감 잠을 청하고, 모닥불의 소리와 벌레들의 소리를 들으며 하늘을 바라본다. 어두운 하늘에서 빛나는 별들을 보고 있으니 알 수 없는 감정이 든다.

그 묘한 감정을 곱씹다 보니 알 수 있었다. 내가 원하던 삶이 이렇게 지극히 평범한 삶이고, 그 원하던 삶에는 내가 사랑하던 이들이 없기에 드는 감정이라는 사실을.

그 감정을 곱씹으며 깊어져 가는 밤을 보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부족한 제 작품을 봐주신 [독자 닉네임 출력]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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