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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하여 아팠다-15화 (15/59)

제 15화

단서

아이리스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혼란스러워진다.

북부에 있어야 할 그녀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어째서 나에게 미소를 짓는가.

모르겠다. 나의 자문에 답을 구할 수 없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저 미소가 불편하다. 희망을 들고 유혹하는 악마의 속삭임 같아서, 저번 삶이 나의 노력이 부족했다고 속삭이는 거 같아서 불편해진다.

불편한 감정과 함께 상념들이 몰려온다. 몰려오는 상념이 머리를 채워갈 때, 레이첼이 내 옆구리를 찌른다.

「형제님 개회식 끝났어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무것도 아니다.”

상념들을 치우고 우리만 남아있는 무대에서 내려간다. 우리가 무대에서 내려가자 발표되는 대진표를 본다.

32명의 토너먼트 대전에서 내가 첫 번째 경기고, 레이첼이 마지막 경기로 배정되었다.

「형제님 결승에서 만나겠네요.」

그 말이 상념의 온전히 버리지 못한 나에게, 현실을 마주하게 만든다.

내가 겪은 미래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짐승을 죽이기 위해서, 난 이 수백 년을 살았을지도 모르는 괴물과 싸워서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

상념 따위에 빠질 시간은 없다. 승리를 향한 갈망을 빼고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그래. 결승에서 만나겠지.”

「그러면 그때 봐요!」

그렇게 적은 글을 보여주고는 그녀는 대기실로 돌아간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의 준비를 한다. 지난 삶을 포함하더라도 나보다 오래 살았을 괴물을 사냥하기 위해서, 마음 한구석에 있는 검을 간다.

시간은 흐르고 나와 그녀는 막힘없이 승리를 쟁취하고, 마지막을 장식할 투쟁을 눈앞에 두고 무대로 향한다.

먼저 오른 무대에서 나의 가장 큰 벽이 될 그녀를 기다린다. 콜로세움을 꽉 채우는 함성과 함께 그녀가 등장한다.

아침까지만 해도 입고 있던 펑퍼짐한 로브는 어디 가고, 머리 전체를 가리는 투구와 몸의 선이 다 드러나는 달라붙는 가죽옷을 입고 등장한다.

싸우는데 방해될 펑퍼짐한 로브를 버리고 온 그녀는, 나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넨다.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기만 하고, 검을 뽑아 들어 자세를 잡는다. 그녀 또한 두 단검을 고쳐 잡는다.

시끄러운 관중들의 소리를 뚫고 시작을 알리는 뿔피리가 울려 퍼진다. 그 소리와 함께 그녀는 천천히 움직인다. 느리지만, 뱀 같은 음습함이 느껴지는 동작에 본능의 경고를 느끼고, 몸에 자리한 마나를 끌어올려 육체를 강화시키고, 막아낼 준비를 한다. 아니 했었다.

그녀는 어느새 나의 품으로 파고들어 오고 있었고, 눈으로는 보았지만 느려터진 몸은 반응하지 못한다. 목을 노려오는 단검을 막기 위해 왼쪽 어깨를 틀어 목을 지켜낸다. 목을 지켜내고 바로 반격을 이어나가려 했지만, 내 간격에서 부드럽게 빠져나간다.

그녀보다 그나마 유리한 점이었던 간격이 의미가 없어졌다. 그녀의 속도를 느려터진 몸이 따라가지 못하고, 그녀는 나의 간격을 자유롭게 오가며 공격을 해온다.

처음 당했던 어깨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가는 자잘한 자상들이 몸에서 힘을 빼앗아 간다. 반면에, 그녀는 멀쩡한 상태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본다.

그녀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서, 얼마 없는 마나를 끌어올려 신체 능력을 강화해도 몸이 생각을 따라오지 못하고, 그녀의 공격에 농락만 당한다.

그런 상황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승기는 사라져가고 마음은 조급해져 간다. 그런 마음을 억지로 누르며, 눈으로는 계속 그녀를 쫓는다.

또다시 간격 안으로 파고드는 그녀가 올 위치를 예상하고 검을 찔러 넣는다. 찔러 넣은 검은 허공을 찌르고 또 틈을 내어준다.

새롭게 생겨난 자상과, 먼저 생겨난 많은 자상에서 피가 흘러나오며, 의식이 조금씩 흐릿해진다.

점점 흐릿해지는 의식, 많은 피를 흘려서 힘을 잃어가는 육신, 이제는 바닥을 보이는 마나. 상황은 최악이다. 패배가 코앞까지 다가온다. 최악이라 하여도 이겨야 하기에 억지로 힘을 쥐어 짜낸다. 마지막 남은 마나를 바닥까지 긁어모으고 도박을 준비하며, 그녀가 다시 파고들기를 기다린다.

반쯤 승리를 얻은 그녀는 내 주변을 맴돌다가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서 다가온다. 그런 그녀를 향해서 검을 던진다. 검은 그녀의 옷자락도 스치지도 못하고, 동작도 멈추지 못했다.

검이 없어진 나를 향해서 그녀의 단검이 뻗어온다. 나의 피를 가득 머금은 단검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받아들인 단검은 왼쪽 어깨와 배를 파고들어 온다.

이 순간을 위해서 준비한 마나를 상처 부위로 응축시키고 근육과 같이 굳힌다. 얼마 안 되는 마나와 근육의 힘이 검을 붙잡는 순간은 찰나의 순간이지만 충분했다.

단검을 내 몸에서 빼내지 못한 그녀의 목에 손을 뻗어 잡는 데 성공한다. 목을 잡힌 그녀는 내 몸에 박힌 칼을 휘젓는다. 근육과 살이 난자당하며 고통이 몰려오지만, 고통으로 포기하기에는 눈앞에 있는 과실은 너무 달콤하였다.

한계를 맞이한 몸을 정신력으로 억지로 움직인다. 너무 얇은 그녀의 목을 조르며 바닥으로 내리꽂는다.

돌로 된 바닥이 움푹 파이고, 내 몸을 휘젓는 검의 움직임이 멈추고, 그녀의 몸이 축 늘어진다.

그것을 보고 거친 호흡과 피가 섞인 침을 뱉어내고, 승리의 의미로 팔을 들어 올린다. 귀를 울리는 함성에 심장이 거세게 뛴다. 오랫동안 전사로서 살아온 삶이 기쁨을 만끽한다.

그 기쁨을 곱씹으며 기절한 그녀를 챙기려고 손을 뻗었을 때, 어지러움과 함께 몸의 통제를 잃고 몸이 무너진다.

몸이 통제를 잃고 무너졌지만, 차가고 딱딱한 바닥의 촉감은 느껴지지 않고, 따뜻함을 느끼며 정신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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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롱한 정신과 함께 힘겹게 눈을 뜬다.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 나를 반긴다.

“그대는 생각보다 무리하는 경향이 있군.”

익숙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아이리스 그녀가 의자에 앉아서 나를 지켜본다.

“당신이 왜 여기에?”

“약혼자가 다쳤는데 보러 오는 것이 문제인가?”

아직 약혼이 깨지지 않았으니 반박할 수 없지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인정하는 것 같아 입을 연다.

“저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는 나를 지긋이 보고는 고개를 한번 끄덕인다.

“그래. 그대는 그렇게 말했었지. 하지만 나는 그대를 놓아줄 생각이 없네.”

그 말이 나를 때린다.

어째서 그녀는 나를 놓아주지 않는가. 어째서 나의 마음을 흔들어 대는가.

그녀의 말에 많은 상념들이 들고, 입으로 내뱉으려고도 했지만 나오지 않는다. 그런 나를 보고 그녀가 입을 연다.

“그대는 감정이 없는 사람과 결혼할 수 없다고 했지. 그대가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그것만 해결되면 문제가 없는 것 아닌가?”

그녀의 말에 버리고 도려내 버린 응어리가 다시 생겨나고 올라온다.

내 삶을 바쳐가며 방법을 갈구하고, 세상을 돌아다녀도 찾지 못했는데 어떻게 찾겠다는 말인가. 그런 나를 부정했던 그녀가 왜 먼저 나서는 것인가.

왜 나에게 일말의 희망을 품게 하는가.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치고, 나를 어지럽게 만든다. 그리고 지금 가장 하고 싶은 말을 꺼낸다.

“왜? 왜 그렇게까지 저를 붙잡으시는 겁니까? 저는 가진 것 하나 없는 자입니다. 그런 저를 붙잡아 봤자 뭐가 있다고 붙잡으시는 겁니까?”

그녀는 눈을 한 번 감고는 천천히 입을 연다.

“내가 그러고 싶어서 붙잡는 것이다.”

마음이 요동친다. 나는 그녀를 떠나보냈는데, 지난 삶을 떠나보냈는데 그녀는 나를 붙잡는다.

그 사실이 불편하다. 그것이 내가 조금만 더 잘했으면 그녀를 바꿀 수 있었다는 사실처럼 느껴져, 나를 미치도록 불편하게 만든다. 이런 나의 심정을 모를 그녀는 말을 이어나간다.

“나는 그대에 대해서 잘 모른다. 하지만 놓치면 후회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나는 너를 놓아주지 않겠다. 그대가 지금은 나를 거부할지라도, 나중에는 나를 돌아보게 할 거다.”

그녀는 전의 삶에서 내가 한 생각과 똑같은 말을 내뱉는다. 그것이 악마의 장난 같으면서도, 손을 뻗고 싶어질 만큼 매력적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다. 나를 싫어하는 환자를 계속 붙잡고 있을 수는 없으니 이만 가보겠네.”

그녀는 나의 마음을 흔들고는 떠나가고 나는 그녀가 간 자리를 멍하니 쳐다만 본다.

그렇게 그녀가 가버린 자리를 쳐다보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펑퍼짐한 후드를 입은 레이첼이 들어왔다.

“형제님 정신 차리셨네요. 신관이 치유하고 가긴 했는데, 어디 아픈 곳은 없으세요?”

몸은 아프지 않지만, 다른 곳이 아프다.

“형제님?”

다시 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온다.

“그래. 몸은 괜찮다.”

“다행이네요. 그것보다 마지막에 너무 했어요! 엄청 아팠다고요.”

나를 난도질한 그녀가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에 평소에는 웃었겠지만, 지금은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아 그보다 형제님 돌봐주신 사람 아시는 분이세요?”

“그래. 아는 사람이다.”

“정말요? 혹시 같은 곳에서 축복을 받으신 거예요?”

그녀의 말에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다시 말해봐.”

“같은 곳에서 축복을 받으신 거예요?”

“축복이라니? 아이리스도 축복을 받았나?”

“네.”

그 말에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리가 더욱 복잡해지고,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가 입을 연다.

“혹시 축복의 대가로 감정을 잃을 수도 있나?”

“음. 그건 잘 모르겠는데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해요.”

그 말이 비수가 되어 내 심장을 찌르고, 피 대신 감정이 뿜어져 나온다. 많은 생각들이 들어차고, 응어리를 토해내고 싶지만 억지로 참는다.

“그럼 네가 말하는 대사제님을 찾아가면 알 수 있나?”

“네! 대사제님은 카이안님에 관해서는 다 알고 있으세요.”

그 말에 저울질하던 고민은 결정되었다.

“나를 대사제님께 데려가 줄 수 있나?”

“물론이죠. 대사제님도 축복받은 형제님이라면 환영하실 거예요.”

“그럼 준비를 좀하고 같이 가자.”

“네.”

나의 삶의 고통 받게 한 저주의 단서를 발견하고, 포기했던 가능성에 대한 일말의 희망이 피어난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저번 주말에 신청한 일러스트가 나왔습니다! 약간 청순한 느낌의 아이리스 일러스트가 전 엄청 마음에 드네요.

일러스트도 뽑았으니 조금 느리더라도, 연중 없이 결말까지 걸어가겠습니다!

언제나 댓글은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포가 될 수 있는 질문에는 제가 답변을 드리지 못합니다.

+후회 파트는 누가 칼 들고 협박해도 적을 겁니다! 제가 가장 기대하는 파트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주세요.

오늘도 부족한 제 소설을 봐주신 [독자 닉네임 출력]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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