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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하여 아팠다-8화 (8/59)

제 8화

준비

도려낸 마음을 행복했던 추억으로 채워넣고, 투박한 나의 방에서 꿈이 되어버린 기억을 적어본다.

선명한 기억들과 흐릿한 기억들이 뒤섞여 엉망이지만, 흐릿한 기억들은 중요하지 않았기에 상관없다.

중요하지 않은 흐릿한 기억들은 따로 모아두고, 큰 흐름을 이어서 완성시킨다.

완성된 흐름을 보며, 지독한 악몽을 피하기 위해 최선을 찾는다.

그녀의 저주를 풀고 짝사랑을 이룰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행복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지극히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경험했기에 알고 있다. 그리니 선을 그어 지운다.

그것을 지우니, 파혼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한번 실패하여, 희박한 가능성만이 남은 선택지.

아비 같지 않은 아비는 파혼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고, 그녀의 미움을 사는 것은 실패했다. 그러니 파혼을 하기 위해서는, 브란트 공작가 보다 더 강한 황실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황실의 도움을 받는 것은 한없이 불가능에 가깝다.

내가 먹음직스러운 고기 같은 위치이거나, 내가 황가의 일원 중 한 명에게 빚을 만들 수 있다면 가능하다. 하지만, 조용히 북부의 맹수가 침을 발라 놓은 것을, 탐을 낼 만큼의 가치는 내게 없다. 황가에 빚을 만들 만한 사건도 없다.

다음 겨울에 황녀님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지만, 그것은 논외다.

해결할 수 있으면 황가에 도움을 구할 수 있겠지만, 내가 죽기 직전까지도 누가 벌인 일인지도 밝혀지지도 않았던 사건인데, 내가 무슨 수로 해결할 수 있겠는가. 경고라도 해서 방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경고를 하려고 해도, 정치 기반이 없는 백작가의 3남이 황가의 일원을 알현하기도 힘들고, 근거도 없는 말을 믿을 리가 없다. 오히려 엮이면 죽을 확률이 높으니 피해야 한다.

희박한 가능성에 파혼을 지운다.

해주와 파혼을 지우니, 도망친다는 선택만이 남았다. 배상금으로 꼭지가 돌은 아비에게서 평생을 도망치며 살아가야 하기에, 보류했던 선택지다. 하자가 있는 선택지지만, 지금은 가장 괜찮은 선택지가 되었다.

큰 흐름을 보며, 아비의 손이 닿지 않을 장소를 고른다.

제국 동쪽에 있는 뉴델 왕국으로 망명하는 것. 그리고 이종족들과 야만인의 영역으로 도망치는 방법.

제국 동쪽에 있는 뉴델 왕국으로 망명은 언어와 치안이 걸린다. 언어 체계랑 발음 구조도 달라서 언어를 익히기도 힘들고, 배우는 동안 통역을 데리고 다닐 만한 여유도 없다. 그리고 10년째 이어지는 반군 세력에 나라 모양새만 하고 있지, 언제 칼침 맞을지 모르는 무법지대로 변했으니 하자가 너무 많기에 보류한다.

뉴델 왕국을 보류하고, 이종족들과 야만인들의 영역 분류한다.

분류한 대부분의 지역은, 해주법을 찾아 그들의 영역에 방문한 적이 있다. 덕분에 그곳의 지리와 생활 방식을 알기에, 뉴델 왕국보다 사정이 낫다.

그리고 제국과 교류하는 이종족과 야만인 부족이 생각보다 많기에, 언어 문제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리 생각하며, 분류한 영역들과 기억 속 정보들을 찬찬히 훑어본다.

서쪽 대수림과 초원에 있는 이종족들은 타종족에 대한 배타성이 강한 편이다. 그래도 수인들은 강자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방식이라, 힘만 있으면 타종족이어도 어느 정도 존중해주니 나쁘지 않다. 거기다 어느정도 신뢰가 쌓이면, 무리의 구성원으로 받아 주니 가장 괜찮아 보인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인간의 육체보다 월등히 우월한 육체를 가진 수인들에게는 무시당하거나, 쫓겨날 것이 걸리기에 잠시 미루어 둔다.

남부의 이종족들은 특정 종족 말고는 배타성이 없어 괜찮지만, 그들의 문화와 생활 방식이 너무 이질적이라 적응하기 힘들다. 남부의 이종족들도 잠시 미루어둔다.

이종족들을 전부 보류하고, 야만인들의 영역을 본다.

남부의 야만인들이 있는 곳은 식인을 즐기고, 산 제물을 바치는 역겨운 놈들이 가득한 지옥이니 논외다.

북부의 야만인들. 그들의 생활방식과 문화는 북부와 비슷하기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야만인들의 영역을 가려면 북부를 가로질러야 하기에, 그녀의 귀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지워버린다.

야만인들의 영역은 전부 지워버리고, 보류했던 이종족들의 영역만이 남았다. 남은 서쪽의 이종족과 남부의 이종족을 저울질하며 고민을 했다.

배타성은 적지만, 적응하기 힘든 문화와 생활 양식을 가진 남부 이종족. 배타성이 심하지만, 강자들은 존중하며, 환영하는 서쪽의 이종족.

그 두종족에 대한 기억과 생각들이 어지러이 스쳐 지나가고, 서쪽의 이종족 영토로 저울이 기운다.

저울이 기울었으니, 움직여야 할 때가 왔다.

무력을 키워야 한다. 아직 정신을 따라가지 못하는, 육체와 마나를 단련해야 한다. 육체는 실전과 수련으로 조율하다 보면 괜찮아지지만, 마나는 아니다.

몸속의 마나의 양도 적고, 마나가 다니는 길도 엉성한 상태인 건 고작 몇 달이나 1, 2년 정도의 수련으로는 부족하다.

괜찮은 영약이 있다면 빠르게 성취를 얻을 수 있겠지만, 비싸기도 하고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구하기도 힘드니, 이번에 열리는 무투대회를 노려야 한다.

수도 베디네티오에 있는 콜로세움에서, 반년에 한 번씩 무투대회가 열린다. 그 대회에서 매번 하급이긴 하지만 영약이 우승 상품으로 주어진다. 어느 정도 이름을 날린 사람은 나오지 않는 게 불문율이라, 우승을 노려볼만하고, 목숨을 건 실전은 아니지만 괜찮은 수준의 사람들과 싸울 수 있으니 나쁘지 않다.

쓸데없는 관심이 끌리는 게 좀 거슬리지만, 이만한 기회는 없으니 반드시 노려야 한다. 생각을 정리하고 수도를 가기 위해, 날 팔아먹은 인간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고급 원목으로 만들어진 사치스러운 문에 가볍게 노크를 한다.

“가주님 할 말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들어오거라.”

문을 열고 들어간 집무실은 찾아올 사람이 별로 없음에도, 자기만족을 위해 쓸데없이 화려한 장식품으로 꾸며진 방이 펼쳐진다. 그 방은 능력보다 허영심이 더 큰 그 인간의 그대로 빼다 박아 넣은 것 같아, 구역감이 올라온다.

“그래, 공녀님에 관련된 이야기로 찾아온 것이냐?”

“그건 아닙니다.”

그 인간은 공녀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자, 나를 보던 시선을 책상에 널브러진 서류들로 옮겨졌다.

“다음에 열릴 무투대회에 참전하기 위해서 올라갈 생각입니다.”

나의 말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그 인간의 이마에 잔주름이 생겨나고 서류로 갔던 시선은 나에게로 돌아온다.

“넌 너의 입장을 자각하고는 있는 거냐? 넌 지금 브란트 공작가의 데릴사위가 될 사람이다.”

“충분히 자각하고 있습니다.”

나의 대답이 더 성질을 자극했는지, 얼굴이 붉어지고 그의 언성이 높아진다.

“뭐가 충분히 자각하고 있다는 거냐! 무투대회에서 살인 금지에, 치료의 기적을 받은 신관들도 불러서 안전에 유의하지만, 매번 죽거나 불구가 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게 나온다. 만약에 재수 없이 네가 그렇게 돼서 계약이 파투 나면, 우리 가문 얼마나 배상해야 하는지 아느냐? 적어도 우리 영지 3년 치 수입은 그대로 날아간단 말이다!”

그저 나를 상품 정도로 보는 그 시선을 보니, 짜증이 올라온다.

“그것 또한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기권하겠습니다.”

“기권하든 안 하든 중요하지 않다. 브란트 가문이 원하는 건 영향력 없이 조용히 있을 데릴사위다. 네가 거기서 명성을 얻기라도 해서 꼬투리 잡히면, 네가 책임질 것이냐?”

“명성을 얻는다고 꼬투리를 잡힐 일은 없습니다. 브란트 공작가의 명성은 고작 데릴사위가 무투대회에서 얻은 명성으로 영향력이 생길만한 가문도 아니며, 오히려 좋은 성적을 낸다면 좋은 핏줄을 얻었다고 생각할 겁니다.”

역겨운 그 인간의 시선에 맞추기 위해. 젊은 전사들이 갈망하는 명성을 상품의 옵션 정도로 절락시킨다. 나를 종마 정도로 낮추어, 그 인간의 눈높이에 맞춘다. 그 인간은 입을 다물고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잠시 고민을 하고는 이내 입을 연다.

“후... 그래 그쪽의 생각은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니 알아서 해라. 하지만, 어딘가 상해서 오진 마라. 쯧, 칼 든 놈들은 그런 게 뭐가 좋다고.”

“... 알겠습니다. 전해야 할 용건은 다 말했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덧붙이는 말에 짜증이 몰려오지만, 그 감정을 무시하며 용건이 사라진 이 역겨운 곳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등을 돌리고 문을 열었을 때, 그 인간을 나를 불러 세운다.

“수도로 가면 수도 저택에서 네 형들이랑 같이 지낼 테니 안부나 확인해 봐라. 후계자가 정해졌어도 자식이란 놈들이, 아비한테 편지 하나 보내지 않으니 원.”

“알겠습니다.”

역겨운 장소에서 문을 닫고 나오니 한숨이 나온다.

형 같지 않은 형들을 다시 볼 생각에 머리가 아파온다.

그런 것들에 심력을 빼앗기기에는, 나를 짓누르는 운명이 너무나 무겁고 버겁기에, 그 인간들의 얼굴을 머리에서 지워버린다.

쓸모없는 것들을 머리에서 치우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준비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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