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화
추억으로 채우다
지난 삶을 떠나보내고, 기절하듯이 잠에 빠져들었다. 잠에서 깨어나니 아이리스는 편지를 남기고 돌아갔다.
「제 가문의 비밀을 어떻게 알았는지 묻지 않겠습니다.
예법에 어긋난 경의 행동을 책망하지 않겠습니다.
저에게서 무엇을 보고 그렇게 슬퍼하셨는지도 묻지 않겠습니다.
다만 경의 파혼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경의 마음이 불안정해 보이니, 조금 떨어져 시간을 갖는 것이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당신의 상태를 생각하여, 먼저 찾아가지 않겠습니다.
당신을 기다리며, 저 또한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있겠습니다.
언젠가 마음이 정리되시면 북부를 찾아와 주십시오. 북부는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편지의 내용에 여러 생각과 감정이 뒤섞인다.
감정적으로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내뱉은 미숙함에 대한 부끄러움. 가문을 비밀을 알고 있음에도 캐묻지 않는 그녀의 행동에 대한 안도감. 배려를 해주며, 기다리겠다는 기억과는 어긋난 그녀의 모습에 대한 이질감. 그리고 편지에 적힌 준비에 대한 궁금증이 뒤섞인다.
그 감정과 생각이 뒤섞이며 심란함이 찾아왔다. 찾아온 심란함에 머리를 어지럽힌다. 심란함의 원인인 편지를 구겨서 던져버린다. 화풀이로 한 행동에도, 마음은 여전하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졌다.
나를 가득 채우는 심란함에 머리가 아파 침대에 몸을 맡긴다. 누워있으니, 며칠째 보고 있음에도 실감 나지 않는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그 천장을 멍하니 보고 있으니, 도려내 버린 마음 너머에서 이제는 흐릿해져 버린 옛 기억이 밀려온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과 행복한 일들이 많다는 것을 알려주신, 어머니와의 행복했던 추억들이 떠오른다. 그 추억에 잠겨 있을 때. 아버지와 형들의 얼굴이 나타난다.
불쾌한 그것들에 행복했던 추억이 사라지고, 더럽혀진다.
12년이 넘도록 나와 어머니를 방치하고, 수도의 향락과 문란한 생활을 즐긴 인간. 유하고 따뜻한 어머니의 마음에 흉터를 남기고, 눈물로 지새우게 만든 인간말종. 기사가 되어 사람을 지켜주고 싶다는, 어린 꿈을 짓밟고 매질하던 아비 같지 않은 아비.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어머니를 무시하고, 어머니로 여기지도 않던 인간말종들. 맷집훈련이라며, 목검으로 동생을 후려치던 형 같지 않은 형들. 아비와 닮아 향락에 빠져 살다, 가문을 말아먹고 나에게 손을 벌리던 염치 없던 자들.
불쾌한 그자들의 얼굴이 사라지고, 미련하게 그들을 가족이라고 생각하던 어릴 적 나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런 나를 보며, 자신의 잘못이라며 우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선명한 어머니의 울음소리에, 한차례 도려낸 마음에 통증이 찾아오고 심란함이 커진다.
마음의 통증과 나를 짓누르는 심란함 떨쳐내고 싶어서, 행복했던 시절의 흔적을 쫓으러 걸음을 옮긴다. 걸음은 추억이 스민 어머니의 방 앞에서 멈추고, 손은 추억을 갈구하며 뻗어나간다.
문이 열리고, 추억과는 조금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어머니가 사용하시던 침대와 가구들은 흰 천으로 덮여있고, 방의 벽지는 바래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그 광경에서 느껴지는 추억과의 간격에 조금 씁쓸하지만, 이상한 일도 아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년이 지났고, 돌아가시기 5년 전에 수도의 저택으로 올라가셨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성은 그렇게 말하지만, 씁쓸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는 씁쓸함 속에서 흰 천들을 벗겨낸다. 먼지가 조금 휘날리고, 방의 모습은 추억과 조금 가까워졌다.
추억과 조금 가까워진 방에서 흔적들을 쫓는다.
작아진 소파에 앉으니, 어머니의 흥얼거림이 들려온다. 그 흥얼거림과 함께 자수를 놓으시던 흐릿한 어머니의 모습이 나타나고, 그 흥얼거림을 좋아하던 어린 내가 어머니의 옆에 나타났다. 어머니와 어린 나의 눈이 마주치고 웃음이 피어나고, 그 광경이 흩어진다.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로 향한다. 어머니와 어린 내가 다시 나타났다. 어머니는 나에게 이불을 덮어주시고, 책을 읽어주셨다. 어린 나는 책의 내용에 눈을 반짝이다가, 졸음을 이겨내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어머니는 그런 나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셨다.
‘좋은 꿈 꾸거라. 나의 행복아.’
잠결 너머로 들렸던 말이 들려오고, 그 광경이 흩어지고 다시 나타났다.
얼굴은 붉게 익어버리고 힘겨운 호흡을 이어나가는 어린 나. 물에 적신 천을 짜며 땀을 닦아내어 주시며 눈물을 흘리시던 어머니.
뜨거움 너머에 찾아오는 차가움과 따뜻함이 전해져온다. 그 느낌에 조금 편안해져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전 괜찮아요.’
괜찮지 않으면서, 어머니의 슬픈 얼굴이 싫어 억지로 웃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삼키시고, 나의 뺨을 어루만져 주셨다. 차가움과 따스함이 어우러진 시간이 흩어진다.
책장으로 향한다. 눈이 닿는 위치에는 어머니의 책들이 보이고, 그 아래에는 동화책들과 영웅전들이 꽂혀있다. 어린 내가 나타나 영웅전을 뽑아 들고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어머니, 오늘은 이거 읽어주세요.’
어린 나의 말에 어머니는 웃으시고, 책을 읽어주셨다. 나는 어머니의 다리에 머리를 대고 이야기를 들었다. 나의 표정은 시시각각 편했고, 마지막에는 웃음이 피어났다. 그리고 그 광경이 흩어진다.
광경이 흩어진 자리를 멍하니 보고 있으니,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머니, 오늘은 뭐 하실 거예요?’
‘음, 날씨도 화창하니 정원에서 산책이나 할까?’
‘좋아요!’
목소리와 함께 나타난 어머니와 어린 내가 손을 잡고 걸어간다. 나는 그 광경에 홀려, 그 뒤를 따른다.
어린 나의 걸음에 맞춘 느릿한 속도 속에서, 어머니의 손을 열심히 붙잡고 있는 작은 손에 눈을 빼앗긴 채 걷다 보니, 풍경이 정원으로 변했다.
튤립만이 피어있는 정원에 다양한 꽃들이 일렁이며 피어난다. 꽃의 이름과 꽃말을 알려주시는 어머니와 그걸 듣고 있는 어린 내가 스쳐 지나간다.
꽃밭에 어머니와 어린 내가 나타났다. 어머니는 나의 머리에 화관을 씌워주셨다. 나는 그 화관을 보며, 꽃들을 얼기설기 엮어 엉성한 화관을 만들어 어머니에게 드렸다. 어머니는 조잡한 화관을 받으시고는 웃음을 보여주셨다. 어머니의 웃음과 함께 흩어진다.
정원의 중앙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정원의 중앙에 놓인 테이블에 차와 쿠키가 나타나고, 쿠키를 한입 베어 무는 어린 나와 그걸 웃으며 바라보시는 어머니가 나타났다.
‘어머니, 이거 드셔보세요. 엄청 맛있어요!’
활짝 웃으며 말하는 나를 보며, 어머니는 웃으시고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나는 그 따뜻하고 상냥한 손길에 젖어 들었다. 흐릿한 온기와 함께 흩어진다.
흩어진 어린 나와 어머니는 정원 구석에 있는 나무에 나타났다.
‘어머니, 새가 떨어져 있어요.’
‘날개를 다쳤나 보구나.’
‘그럼 이제는 못 나는 거예요?’
‘나을 때까지는 못 날지.’
‘그러면, 제가 다 나을 때까지 돌봐줄래요.’
‘알릭은 상냥하구나.’
다친 새를 조심히 손에 든 어린 나와 어머니가 흩어진다. 그리고 작디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새와의 짧은 만남과 이별에 울음을 참는 어린 나. 그리고 그런 나를 끌어안고 다독여 주시는 어머니가 나타나고 흩어진다.
조금 커버린 내가 목검을 휘두르며, 방울진 땀을 흘렸다. 어머니는 그런 나에게 다가오시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셨다.
‘무리하지 말거라.’
‘네!’
여전히 어린 나를 기특히 여기시면서도, 걱정해주시는 어머니와 씩씩하게 답하는 내가 흩어진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어느 정도 자란 나와 어머니가 나타났다.
‘어머니, 꼭 가셔야 합니까?’
‘...미안하구나.’
나와 어머니의 거리가 멀어지고 환상은 흩어진다. 추억이 만들어낸 환상은 어머니와의 이별을 보여주며, 끝을 고한다.
추억의 환상이 끝나니, 상처 입고 스스로 도려낸 마음에 심란함이 사라졌다. 심란함이 사라진 자리에는 환상이 남기고 간 것들이 놓여있었다.
어머니의 콧노래 소리와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어머니의 잔잔하고 따스한 목소리. 젖은 천의 시원함과 따스함. 크고 따뜻했던 어머니의 손. 어머니가 알려주신 꽃의 이름과 꽃말. 엉성한 화관에도 피어나는 미소.
너무나 좋아하고, 사랑하며, 행복했던 기억들이 향수가 되어 망가진 마음을 적시고 채운다.
향수는 너무나 따스하고, 상냥하여, 서늘한 아침의 이불과 같아 벗어나고 싶지 않다. 계속 그것에 잠겨있고 싶다.
향수가 눈을 가린다. 눈을 가리는 향수를 거부하지 않고, 곱씹어 나를 채운다. 향수를 온전히 담고, 눈을 가리는 향수를 밀어낸다. 가려진 눈을 뜨고 쓰디쓴 현실을 바라본다. 어머니가 없는 정원과 꿈이 보여준 참담한 미래.
그 현실을 직시하니, 향수에 녹아 사라졌던 심란함이 다시 얼굴을 들이민다. 심란함이 다시 머리를 어지럽히지만, 이를 악물고 감내한다.
망가질 정도로 울고 슬퍼하였으며, 행복한 추억에 잠겼으니, 눈을 돌리는 것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 난도질당하고. 찢기고, 스스로 도려내어 비명을 지르는 마음을, 행복했던 추억들로 메꾸었으니 마음 또한 충분하다.
새로이 채워진 마음을 품고, 과거와 꿈이 되어버린 미래가 아닌, 앞으로의 삶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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