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화
떠나보낸다
그를 끌어안은 날, 부끄러움에 몸부림치며 밤을 지새웠다.
왜 이리도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는지 모르겠다.
감정은 쓸데없는 것이라고, 약점이라고 배웠기에 감정을 죽여갔는데... 그 남자와 관련되고 나서부터는 감정이 조절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 남자의 행동 하나하나 짜증 나고 화가 났다.
그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감정에 휘둘려 그에게 큰 실수를 범했다. 그 이후로 마음에는 짐이 생겨났다.
그 짐을 치우고자 사과하려고 그를 찾아갔다. 슬퍼 보이는 표정으로 노란 튤립의 향을 맡고 있던 그를 보고 있으니, 알 수 없는 감정과 함께 그와 무언가가 겹쳐 보여 말을 전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를 바라만 보았다.
그런 나를 두고 가는 그를 붙잡다 힘 조절을 못 하고 그를 끌어 앉았을 때, 감당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와 만나고 느낀 감정들이 하나하나가 전부 약점이다.
약점을 늘어나는 것이 내가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거 같아 싫었다.
그래서 그 남자에게 사과만 하고 돌아가려 했는데, 그를 볼 때마다 그를 끌어안은 내 모습이 생각나 입이 열리지 않는다.
겨우 끌어안은 거로, 왜 이리도 내면이 요동치는 것인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지금도 그에게 말하지 못하고 지켜보고만 있는 거겠지.
한숨이 나온다.
감정 하나 못 조절에 이렇게 초조해하는 나의 모습이 한심스럽고, 감정을 심히도 자극하는 남자를 약혼자로 선정한 아버님의 의중을 알 수 없어 답답하다.
그렇게 감정은 쓸데없는 것이고, 약점이라고 세뇌하듯이 가르치셨으면서 이런 남자를...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을 절제할 수 있도록 하라는 걸까, 아니면 아무 뜻도 없는데 나 혼자 과대망상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아버님이 아니기에 의중을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 약점들을 잘라내야 한다. 잘라내지 못하면 브란트라는 이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 또 전사로서 실격인 짓을 할 것이다.
그러니 잘라내야 한다.
그에게 사과하고 떨어져 지내며 다시 감정을 죽이면 해결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에게 다가갔지만. 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그가 사과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처음 맞이하는 상황에 불길한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사과를 받아주지 않으면. 마음속에 남아버린 짐이 내 발목을 부여잡지 않을까?
마음 한구석에 뿌리를 내려 약점을 잘라내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무슨 일 있으십니까?”
어느새 다가온 그가 눈앞에 보이자 불길한 생각들이 머리에서 터질 듯이 팽창해서, 해야 할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 아무것도 아닙니다.”
불길한 생각에 마음이 요동쳐 얼버무리고 도망쳤다.
이런 일을 몇 번 반복하자, 가문에서 따라온 하녀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얘들아, 공녀님이랑 알릭경이랑 있는 거 봤어?”
“봤어 봤어. 알릭경 보시더니 얼굴 붉히며 도망가는 거 있지, 그런 모습 처음 봐.”
“그러니까. 목석같으신 분이 사랑에 빠진 소녀같이 모습을 보여주니까 되게 귀엽더라.”
사람의 한계치에 가까워진 청력에 잡힌 하녀들의 수다가 거슬린다. 한마디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만, 너무 아랫사람을 조여도 좋지 않다고 배웠으니 그냥 무시하며 귀를 닫고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을 느끼며 마음을 진정시킨다.
똑똑
“공녀님 안에 계십니까?”
노크 소리와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직 생각과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그를 보면 다시 똑같은 짓을 반복할 것 같아 없는 척을 한다.
조금 기다리니 문틈 사이로 편지 봉투 끄트머리가 들어온다.
그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문을 살짝 열어 편지 봉투를 들고 와 뜯어본다.
「오늘 밤 진솔한 대화가 하고 싶으니, 첫날밤에 만났던 정원으로 나와 주시길 바랍니다.」
진솔한 대화...
그래 언제까지나 피할 수 없다. 도망칠 수 없다.
나도 한 명의 전사이자, 자랑스러운 브란트 공작가의 후계자 아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마음을 다스리며 밤을 준비한다.
달이 떠올라 밤이 되어 정원으로 나아간다.
정원에 먼저 와서 술을 들이키고 있는 그의 분위기는 평소와는 달랐다.
가식이 섞여 있는 모습이 아닌, 처량한 분위기가 맴돈다.
그는 무엇을 말하기 위해 이 자리를 준비하고, 저런 분위기를 품고 있는가.
그는 나를 환영하며 술이 가득 따라진 잔을 넘긴다.
이번에는 자신의 방식대로 이야기를 준비했다며 술을 권한다.
그가 권하여 마신 술은 아버님이 항상 손에 쥐고 마시던 술과 비슷하였다.
그 술을 입에 털어 넣는다. 쓰고, 독한 맛이 화끈한 느낌과 함께 입과 목을 괴롭힌다.
그 기분 나쁜 맛에 더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마시다 보며 익숙해질 거라고 하는 그의 말에 억지로 또 한 잔을 들이킨다.
기분 나쁜 맛이 더 진해지기만 한다. 이걸 무슨 수로 익숙해진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웃으며 처음 마시는 것치고 잘 마신다며, 다시 따라주며 권하는 모습에 그가 일부로 골탕 먹이는가 싶은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는 이 독한 술을 물 마시는 것처럼 잘 마시는 걸 보니, 그런 건 아닌 거 같다.
이게 그의 방식이라고 했으니, 참고 또 한 잔을 억지로 넘기다가 잘못 넘겨 폐가 연신 비명을 지른다.
간신히 비명 지르는 폐를 진정시키니, 그는 술이 들어갔으니 조금 편한 마음으로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자고 말하며, 이야기의 포문을 열었다.
“요 며칠간 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셨던 것 같아 궁금했는데, 말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바로 들어오는 그의 질문에 심장이 철렁이지만, 사실대로 이야기하니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며, 웃어넘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의 짐이 조금 더 커져간다.
저런 사람에게 말도 없이 오러를 사용해 다치게 할 뻔했다는 사실이, 더 미안해져 다시 한번 사과하려고 했지만, 그는 술잔을 내 입에 들이민다.
“정 미안하시면 한잔 더 드시면 됩니다.”
그 말에 그대로 술을 들이킨다.
그의 말에 마음의 짐이 사라져 간다.
그래서 그런지 술은 처음처럼 마냥 기분 나쁘지 않고, 뜨거운 열기와 함께 기분을 고양시켜줘 웃음이 살짝 나왔다.
그는 이런 나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이내 그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워진다.
그는 술을 연거푸 들이키더니, 슬픔이 깔린 복잡한 표정과 함께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에서 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을 보니 생각보다 먼저 손이 먼저 나간다. 나의 손이 그의 흐르는 눈물을 닦는다.
그의 뜨거운 눈물이, 체온이, 슬퍼 보이는 그의 표정이 내 맘을 두드리며, 또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그와 겹쳐 보인다.
“술이 들어가서 그런 것뿐이니 괜찮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전혀 괜찮지 않아 보인다.
“그보다 공녀님께 꼭 물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슬픔과 함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이 느껴졌다.
“브란트 공작가의 혈육들은 저주를 받아 점차 감정을 느낄 수 없어진다는 게 사실입니까?”
황실과 가문의 일원들에게만 내려오는 이야기를 그가 알고 있는 것이 의문이지만, 그보다 그의 무너져가는 표정과 질문이 겹쳐 보이는 무언가를 선명하게 만든다.
선명해진 그것은, 감정과 함께 버렸던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의 슬픈 표정이 어머니의 표정과 똑같다.
그 모습이 너무 아파 보여 나는 대답하지 못한다.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답은 충분했습니다.”
그는 그 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박차고 떠나간다.
지금 잡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 그를 붙잡지만, 그는 나의 손을 쳐냈다.
“저는 감정 없는 사람과 살아갈 수 없습니다. 파혼을 원합니다.”
그 말이 머리에서 울린다.
“어쩌다 저런 감정 없는 사람과 사랑하고, 결혼하게 되어서.”
서럽게 울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같이 울려온다. 떠나보내야만 했던 어머니가 그와 겹쳐 보인다.
미쳐버려 별관에 유폐된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린다.
울려오는 울음소리에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오지만, 주저앉아 있을 수 없다.
어머니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를 보낼 수 없다.
그를 쫓아야 하는 생각에 억지로 몸을 움직여, 그가 흘린 눈물 자국을 이정표 삼아 달린다.
한참을 이어진 눈물 자국 끝에, 그는 주저앉아 세상이 무너지도록 울부짖는다.
나에게서 무엇을 보고 그리도 슬퍼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를 보니 마음에 세워둔 벽이 무너져 내리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버린 아픈 감정이 범람한다.
너무 아파서 버렸던 슬픔이 범람하여, 내 모든 것을 물들이며 절규한다.
이 감정을, 어머니에게 전해주지 못한 감정을, 어머니와 똑같이 아파하는 그에게 전하고 싶다.
울고 있는 그를 위로해 주고 싶다. 그를 끌어안고 같이 울고 싶다. 아파오는 이 감정을 같이 흘려보내고 싶다. 시리도록 아파오는 아픔을 그의 온기로 데우고 싶지만 할 수 없다.
나는 그를 위로할 수 없다. 그를 끌어안고 같이 울 수 없다. 아파오는 이 감정을 같이 흘려보낼 수 없다. 시리도록 아파오는 아픔을 그의 온기로 데울 수 없다.
그는 나 때문에 아프니까. 나 때문에 슬프니까.
같이 해 봤자 어머니처럼 망가질 테니까.
같이할 수 없다.
그는 나를 원하지 않는다.
나에게 파혼만을 원한다.
감정이 없어질 나는 그와 함께할 수 없다.
그와 이어질 수 없다.
그 사실에 더 아파온다.
아픔이 내 모든 것을 적시고도 부족하여, 눈물과 함께 흘러내린다.
감정이 없어져야 할 내가 싫어진다.
어머니와 그를 아프게 하는 나의 피가 미워진다.
그러면서도, 그를 갈망한다.
다시 한번 그의 따뜻한 체온을 갈망한다.
그와 이어지고 싶지만 참아야 한다. 지금은 보내줘야 한다.
억지로 붙들면 어머니처럼 망가질 테니 잠깐만... 아주 잠깐만 그를 보내주고 찾아오리라.
어머니같이 영원히 떠나보내지 않으리라.
나의 삶에 첫 실연이지만, 그대로 끝나지 않으리라.
저주를 해결하고 그를 다시 데려오리라.
그러니 지금은 떠나보낼 그를 조금만 더 눈에 넣어둔다...
그가 슬픔을, 눈물을 털어낼 때까지, 멀리서 그를 마음에 담아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