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화
떠나보낸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그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녀가 이곳에 왔는지 5일째 첫날을 이후로 매일 그녀는 매일 내 주변을 맴돈다. 그녀는 어중간한 거리에서 나를 관찰하며, 무언갈 말하고 싶은 분위기를 풍긴다.
그 시선이 신경 쓰여 먼저 말을 걸어보면, 매번 같은 반응을 보이며 도망친다..
멀리서 관심을 보이면서도 다가가면 도망치는 고양이 같은 그녀가, 당황하며 도망치는 그녀가 사랑스러워 내 마음을 어지럽힌다.
밀어내야 하는데... 그녀의 다양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새 삶을 얻은 날의 결심은 조금씩 무뎌지고, 마모되고, 아직 감정이 사라지지 않은 그녀를 구할 방법이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 점차 자리를 차지해간다.
긍정적인 마음은 분명 말라비틀어졌는데, 젊은 몸뚱어리에 영향을 받기라도 했는지 생기를 받아 살아나는 것이 느껴져 거슬린다.
한 평생 긍정적인 마음이 보답 받은 적 없는 삶을 살았기에, 젊음의 만용인지 치기인지 모를 것을 마모되어 버린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
이대로 있다가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
결단을 내려야한다.
그녀가 앞으로 감정을 잃을 것을 알지만, 그녀에게서 확인하고 싶다. 그녀가 부정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그러기를 원한다.
그 미련한 마음을 나 혼자서는 지울 수 없어, 그녀에게 다시 한번 상처를 받으러 간다.
그녀가 정말 앞으로 감정을 잃게 된다면, 그녀를 밀어내야 한다.
그녀를 사랑하는 나를 죽여야 한다.
오늘은 많이 아플 테니, 맨 정신으로는 힘들 테니 술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리 생각하여 술 저장고로 가 술들을 둘러본다.
나를 팔아먹은 인간의 취향이 와인 같은 약한 술이라 그런지, 술 저장고의 대부분이 여러 종류의 와인들이 자리를 잡아있고 위스키 종류는 거의 없었다.
몇 없는 위스키들은 풍미도 없는 싸구려들뿐이지만, 즐기려고 마시는 것이 아니니 상관은 없다.
싸구려 위스키를 조금 들이키고 그녀에게로 향한다.
그녀가 있을 귀빈실을 찾아가 노크를 해봤지만, 그녀는 없는지 아무런 반응도 없다.
죽치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으니 방으로 돌아가 편지에 「오늘 밤 진솔한 대화가 하고 싶으니, 첫날밤에 만났던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라는 내용을 적고 그녀의 방 문틈에 끼워두고 정원의 테이블에서 밤을 기다린다.
그녀를 기다리며, 아직도 그녀를 짝사랑하고 있는 나에게 작별을 준비한다.
눈부시게 빛나던 태양은 하루의 일을 마쳐 저물어 버리고, 은은한 빛을 머금은 달과 반짝이는 별들이 어두운 하늘을 장식할 즘 나의 미래를 결정해 줄 그녀가 왔다.
평소보다 붉은 기운을 머금은 그녀는 어디 전장의 가는 사람처럼 어딘가 결연해 보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앉으시죠.”
“네.”
“저번에 공녀님이 대화는 검으로 충분하다고 하셨죠.”
“...네, 그랬었죠.”
그녀에게 상처가 되었을 일을 꺼내자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개를 약간 숙였다.
“그걸로 공녀님의 대화방식으로 대화를 했으니 이번에는 저의 방식대로 대화할 차례라 생각해서 준비해 봤습니다.”
술기운이 더 필요해 위스키로 조금 목을 축이며 말을 이어갔다.
“저는 술을 마시면서 허물없이 대화하는 걸 좋아합니다. 모두 술기운이 올라오면 불편한 가식들은 저기 어딘가에 버려두고 솔직해지기도 하고, 술기운을 빌리면 평소에 하기 힘든 이야기도 좀 더 편하게 할 수 있어지는 점이 참 매력적이죠.”
“그렇군요.”
술기운을 빌리면 평소에 하기 힘든 이야기도 좀 더 편하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그녀의 눈이 반짝인다.
“가볍게 한잔 마시고 시작합시다.”
그녀가 오길 기다리며 준비해둔 잔에 조금 덜 독한 위스키를 가득 담아서 그녀에게 건넨다.
그녀에게 잔을 넘기고 싸구려 위스키를 한가득 입안에 털어 넣는다.
내가 마시는 걸 보고 따라서 위스키를 털어 넣은 그녀의 표정은 술맛을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살짝 찡그려졌다.
“술은 처음 드시는 겁니까?”
“포도주는 몇 번 마셔봤지만 이런 건 처음 먹어봅니다.”
“마시다 보면 익숙해지실 겁니다.”
비어있는 그녀의 잔에 위스키를 붓고 다시 한번 잔을 들어 그녀에게 권한다.
처음 먹는다면 바로 연달아 마시기 힘들 텐데도 그녀는 꿋꿋이 위스키를 털어 넣는다.
“처음 드시는 것 치고 정말 잘 드시는군요. 보기 좋습니다.”
위스키를 연속으로 들이켜 약간 붉어진 그녀에게 다시 한번 그녀의 잔에 위스키를 따라주자 그녀는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3잔 정도는 마셔야 서로 편하게 이야기하기 좋습니다.”
나의 옛 전우가 했던 말을 빌리며 그녀에게 잔을 권한다.
살짝 싫은 기색이 보이는 그녀는 아까보다 느린 속도로 마시다 이내 사레가 들렸는지 연신 기침을 했다.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습니다.”
그녀의 말과는 달리 눈에서 약간의 물기가 맴돈다.
“서로 술이 조금 들어갔으니 조금 편한 마음으로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나 궁금한 걸 물어봅시다.
“네...”
하고 싶은 말은 있어 보이지만, 어째서인지 머뭇거리는 그녀를 대신해 내가 묻는다.
“요 며칠간 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셨던 것 같아 궁금했는데 말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 그게.”
“술자리니 편하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좀 민감한 이야기라도 있으면 술과 함께 잊어버리면 되는 일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면서 머뭇거리는 그녀가 말할 수 있도록 돕는다.
“... 저번 일에 대해서 사죄하고 싶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랬습니다.”
“딱히 다친 것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시죠.”
“그렇다 해도.”
어째서인지 그녀의 사과를 듣고 싶지 않아 더 말하려는 그녀의 입에 다시 위스키를 채운 잔을 들이밀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정 미안하시면 한잔 더 드시면 됩니다.”
그녀는 고민도 없이 들이켰다.
“어떻게 사죄를 드릴지도 막막했고 받아주시지 않을까 봐 걱정했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 말과 함께 그녀의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미소가...
그토록 간절히 갈망했던 그녀의 미소가 이다지도 아름답고 사랑스럽구나.
그 미소를 보고 있으니 마음의 응어리가 눈물로 나올 것 같아 위스키를 들이킨다.
위스키를 들이키고 있음에도 턱없이 부족하다. 더 들이켜 보았지만 이미 부서진 눈물샘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입술을 깨물고 지난 삶의 고독과 아픔을 되새기며, 녹아버리고 있는 응어리를 붙잡는다.
붙잡고 붙잡아 봤지만, 이미 녹아서 흘러나오는 한 줌의 눈물은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괜찮으신가요?”
그녀는 그 말과 함께 흘러내리는 내 눈물을 손으로 닦아준다.
그녀의 말과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에 결심이 금이 갈 정도로 좋으면서도 이리도 따뜻한 그녀가 싫다.
나에게 이 정도, 아니 이보다 못해도 한 줌의 따스함을 죽어버린 삶의 나에게 보여주었다면... 그리도 아프지 않았을 건데, 이렇게 고민하지도 않을 건데 왜 이제야 따스함을 준단 말인가
이런 따스함을 알게 되면 희망을 품지 않을 수 없는데, 그 희망이 무너지면 이 따스함이 나에게 아픔이 되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 것인데
전처럼 감정을 보여주지 않으면, 아픔을 참아내고 마음속에 묻고 떠날 수 있었을 텐데...
바래서는 안 되는 봄을 바란다. 기다려서는 안 되는 봄을 기다린다. 주어지지 않을 봄을 갈망한다.
범람하는 마음을, 생각을 내버려 두고, 무시하고 확인해야 한다.
봄은 정녕 오지 않는가를
“술이 들어가서 그런 것뿐이니 괜찮습니다.”
“그렇군요.”
그녀는 안 믿는 눈치지만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공녀님께 꼭 물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브란트 공작가의 혈육들은 저주를 받아 점차 감정을 느낄 수 없어진다는 게 사실입니까?”
술기운에 약간 붉어진 그녀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았지만 충분했다.
나에게 봄은 오지 않는다.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답은 충분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뜨려 하는 나의 팔을 붙잡는다. 나를 붙잡은 그녀의 온기가 아파서 그녀의 팔을 쳐난다.
그대로 뒤돌아 선체 나의 마음을 전한다.
“저는 감정 없는 사람과 살아갈 수 없습니다. 파혼을 원합니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 자리를 박차고 달린다.
그녀의 대답이 듣기 싫어서, 그녀의 목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런 거에 흔들릴 것 같은 내가 싫어서 과부하 된 폐가 비명을 지를 때까지 달린다.
가문의 저택을 벗어나고도 한참을 달려서 도착한 인적 없는 산에서, 짓밟힌 희망의 아픔과 절망을 절규하며 토해낸다.
다양한 표정을 보여준 그녀를 마음에서 도려낸다. 그녀에 대한 기억을 도려낸다.
그녀를 사랑한 나를 난도질하고 떠나보낸다.
그리고 이제는 태어나지 않을 나의 아이들을 떠나보낸다.
떠나보내니 아무것도 남지 않는 나의 삶이 아프다.
아무것도 남지 않아 뻥 뚫리고 무너진 마음이 너무 아프다.
그 비어버린 마음이 내 사랑의 크기였고 나의 전부였기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들판의 슬픔을 감당할 수 없어 전부 흘려보낸다.
흘린 눈물이 땅을 흥건히 적시도록 흘리고 고장 난 몸을 움직인다.
흙을 모아 작은 무덤을 만들고 적당한 돌을 묘비로 삼는다.
그 앞에 이름 모를 꽃을 놓고, 나의 모든 것들을 묻은 묘에 기도를 올린다.
태어나질 못한 아이들의 영혼들은 따뜻한 가정에 태어나 행복하게 살기를 기원한다.
못난 아비처럼 살아가지 않길 빈다.
색을 잃어버린 겨울이 아닌 다채로운 봄 속에서 살아가길 기원한다.
태어나게 해주지 못한 미안함을 쏟아 낸다.
울고 또 울며 모든 걸 쏟아 내어 떠나보내고, 어둡고 아픈 밤을 지새우며 지난 삶을 떠나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