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화
아이리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원래였으면 돌아갔어야 할 그녀는, 이곳에서 며칠간 지내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날 팔아먹은 인간은 좋다고 환영하며, 그녀를 식사 자리에 초대했다.
주방장과 그 아래 요리사들이 분주하게 준비했는지, 3명이서 먹는 식사라고 보기 힘든 갖은 종류의 요리와, 비싸다고 혼자서만 먹던 고급 와인까지 준비되어 나를 반겨줬다.
브란트 공작가의 차기 가주인 그녀에게 잘 보이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질지 모른다고 생각으로 주방장을 닦달해서 준비시킨 모습이 뻔히 보였다.
이렇게 해봤자 무언가 얻을 수 없다는 걸 뻔히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그 모습이 한편의 만담같이 웃기기만 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 인간은 혼자 웃는 얼굴로 쓸모없고 지루한 이야기들만 떠들어댄다.
나는 더럽게 지루한 이야기들을 대충 흘려들으며, 허브가 올려진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는다.
고기 속에 갇혀있던 육즙이 입에서 터져 나오며 혀를 즐겁게 해주지만, 그녀와 그 인간이 있는 식사 자리는 곤욕스러워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 않는다.
억지로 목구멍으로 음식을 넘겨보니 더 먹으면 체할 것 같아, 준비된 와인만 들이킨다.
잘 숙성되어 포도주의 향에 잘 스며든 오크 향이 잘 어우러져 만들어진 풍미와, 깔끔하게 넘어가는 목 넘김이 만족스럽다. 와인의 모든 점이 다 만족스러웠지만, 와인의 약한 술기운이 아쉬웠다.
술에 취하기라도 하면 이 불편한 자리가 조금은 즐거웠을 건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와인을 홀짝일 때, 더럽게 재미없는 이야기가 끝나고 새로운 주제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원체 여자를 만나지도 않는 놈이라. 오늘 제 못난 아들놈이 공녀님께 무례를 범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습니다. 하하하”
차라리 더럽게 재미없는 이야기나 더 떠들지.
오늘 그녀의 입장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그녀의 성격상 특별한 말은 하지 않겠지.
그러게 생각하면서도, 그녀가 나에게 당한 모욕을 말하길 바란다.
“알릭경은 무례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생각대로 그녀는 별말을 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입맛이 쓰다.
한참을 와인만 들이키고, 이 불편한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일어난다.
“몸이 안 좋아 먼저 가보겠습니다.”
“... 그래 가보거라.”
망할 인간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한 소리 하고 싶어 보였지만, 그녀의 앞에서 그런 추태를 보여줄 수는 없으니 나를 그냥 보내준다.
나오고 나니 계속 들이키던 와인의 술기운은, 아직은 술이 세지 않은 젊은 몸뚱이를 잠식한다.
술기운도 올라오고, 답답함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에 밖으로 향했다.
마침 보름달이 뜬 덕분에 밖은 너무 어둡지 않아 달빛을 등불 삼아 정처 없이 걷는다.
술기운에 몸을 맡기고 한참을 걷다 보니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좋아하시던 정원에 와있었다.
문뜩 별종 취급을 받던 나에게 유일하게 가족의 정을 알려준 어머니가 생각나고, 그리움이 몰려온다. 그 감정에 몸을 맡기고, 정원을 걸으며 어머니의 발자취를 찾아본다.
정원에 피어난 여러 색의 튤립들이 달빛과 봄을 머금어, 봄의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어머니의 향수를 더 느끼고 싶어 튤립에 다가가 향을 맡는다.
어머니가 좋아하던 튤립 향을 맡고 있으니, 세월에 바래버린 추억 속에서 어머니가 해주시던 말이 생각난다.
“튤립의 향이 좋고 예뻐서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색별로 사랑에 관련된 꽃말이 있어서 좋아한단다.”
보라색은 영원한 사랑. 주황색은 고백, 매력적인 사랑. 분홍색은 배려, 애정, 사랑의 시작. 빨간색은 사랑의 표현. 하얀색은 실연. 노란색은 헛된 사랑, 짝사랑이라고 말씀해 주셨지.
나의 삶에 어울리는 노란색 튤립 하나를 꺾어서 다시 한번 향을 느낀다.
“아들아 너는 커서 연인을 만든다면, 너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렴.”
어릴 때는 이해하지 못하고, 청년일 때는 잊고 있던 그 말을 지금은 뼈에 사무치도록 느낀다.
그 말씀을 하시며 지으신 표정에 담긴 감정이 슬픔이었다는 걸, 지금이 되어서야 이해하게 된다.
어머니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아픔을 품고 살아오셨겠지...
한참을 빛바랜 추억에 빠져 향수를 느끼고 나니,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봤다.
푸른 머릿결이 은은한 달빛을 받아 신비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는 그녀가 뒤에 서 있었다.
“언제부터 계셨습니까?”
“방금 왔습니다.”
평생을 나에게 말을 높인 적 없는 그녀가 나에게 말을 높이는 게 기분이 묘했지만, 그보다 그녀는 나를 찾아온 것일까. 아니면 산책을 하다 우연히 보고 온 것일까. 무엇이 되었더라도 그녀가 불편하다.
"혹시 절 찾아오신 겁니까?“
“산책하다가 보니 이곳에 오게 됐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자리를 피하고자 그녀를 스쳐 지나간다.
갑자기 날 당기는 강한 힘에 균형을 잃고 그녀에게 끌려가며, 푹신함과 그리운 온기가 느껴진다.
고개를 돌려보니 약간 붉어진 그녀가 입을 달싹거리고 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부끄럽다는 감정이란 걸 느끼기라도 했는지 고장 나버린 그녀의 표정을 더 감상하며, 그녀의 온기를 느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그럴 사이도 아니고, 그럴 사이가 되어서도 안 된다.
그녀의 품에서 벗어난다.
“하실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그, 그 실례했습니다.”
고장 난 그녀는 말을 더듬으며 무언가 있었을 용건을 말하지 않고는 빠르게 달려간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오늘 저번 삶에서 보았던 그녀보다 다양한 그녀를 보았다.
화를 내는 그녀를, 자존심이 부서졌을 그녀를, 당황하여 얼굴을 붉히며 고장 난 그녀를 보았다.
당연하게 감정을 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지난 삶은 정말로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 같은 모습만 보여주어도 그녀를 사랑하면 살 수 있을 거 같지만, 그녀의 피에 흐르는 저주는 그걸 허락해 주지 않기에 입안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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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버님이 나의 짝이 될 사람을 정했다면서 서류 한 장을 보여주셨다.
알릭 노르먼. 나이는 나와 같은 20살에, 정치와 상계에서 주로 활동하는 노르먼 백작가의 삼남으로 태어나 검에 미쳐버린 별종이라는 남자, 그 정보 옆에는 흔한 갈색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평범하게 생긴 남자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검에 미쳐버린 별종이라는 거 말고는 딱히 눈에 들어오는 정보는 없는 평범한 남자 같지만, 아버님의 결정이니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만나서 한번 확인은 해봐야 하니 보러 간다는 서신을 보내고 다음 날 출발했다.
도착하고 처음 본 내 약혼자의 첫인상은, 최악이었다.
옷은 활동하기 불편할 정도로 화려하게 꾸며진 옷에, 비싼 차를 마시며 쓸데없는 농담이나 하고 다니는 게 일인, 계집들이나 하는 분을 바른 모습에 짜증이 몰려온다.
아버님에게 교육을 받고 나서부터 분명 감정이 적어졌다고 생각했는데, 헤실헤실 웃어대는 상판대기를 보고 있자니 그게 아니라는 걸 느꼈다.
속으로 짜증을 삭이며 그에게 검을 던진다.
검을 받으며 보이는 멍청한 표정을 한 얼굴에 주먹을 때려 박고 싶은 걸 참는다.
“대화는 검으로도 충분하다. 연무장으로 안내하게”
그가 안내한 연무장으로 가 마주 보며 검집에서 검을 뽑아낸다.
행실이 마음에 안 들지만, 아버님이 선정한 남자이니 특별함을 기대하며 자세를 취하고 그의 공격을 기다린다.
하지만 나의 기대에 대한 대답은 허리힘도 들어가지 않은 쓰레기 같은 검술이었다.
쓰레기와 이딴 쓰레기를 약혼자라며 말한 아버님 때문에,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화가 끓어오르는 게 느껴진다.
무식하게 힘만으로 내려치는 그의 검을 흘리고, 폼멜로 그의 명치를 후려쳤다.
뭔가 이상하다. 쓰레기 같은 실력인데 눈은 나의 검을 쫓아오고, 폼멜로 후려칠 때는 단단한 근육에서 느껴지는 반발감과, 그의 손은 굳은살로 가득했다.
이런 인간이 쓰레기 같은 실력일 리가 없다.
그럼 결론은 하나다. 그는 나를 기만하며 실력을 보이지 않고 있다.
분명 검으로 대화하자고 했거늘 자신의 실력을 보이지 않는다.
전사에게 이보다 더한 기만은 없다.
푼수 같은 얼굴로 그가 뭐라 지껄이지만, 머리에 가득 차버린 분노에 들리지 않는다.
그 이후부터는 분노에 이성이 잠식당해 기억이 흐릿하다.
어느 순간 내가 오러를 검에 둘러 휘두르는 미친 짓을 하는 실수를 했을 때, 이성이 돌아왔지만 이미 검은 그를 향했다.
나는 제발 그가 피하길 바랐지만, 그는 피하지 않고 그저 손을 들어 올려 검으로 뻗는 미친 짓을 한다.
그의 손이 잘려 나가리라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손 사이로 검이 빨려가는 느낌을 받으며, 검은 그의 손에 붙잡히고 이상한 느낌과 함께 오러가 흐트러지더니 이내 사라진다.
그의 검이 나의 목을 겨눈다.
대련에서 동의도 없이 오러를 사용하는 실책을 범한 것도 모자라, 검이 잡히는 수치를 당하며 졌다.
“검날을 잡힐 만큼 미숙한 여인을, 전사로 봐줄 수는 없습니다. 공녀님”
어디서 본 듯한 눈을 한 그의 말이, 전사로서 살아가도록 교육받은 내 삶을 부정한다. 나의 잘못들이 비수가 되어 나의 마음을 찌르고, 내 안속의 무언가를 박살 냈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무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 잘못에 대한 사과? 아니면 어떻게 손으로 오러를 두른 검을 잡고는 오러를 없앴는가에 대한 질문?
모르겠다. 돌아가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힘이 빠진다.
알지 못하는 나의 생각과 감정에 어지러움에 몰려온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나서야 어지러움이 조금 사라지고 사고가 돌아간다.
알 수 없는 생각과 감정이 그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여, 이곳에 한동안 머무르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노르먼 백작에게 양해를 구하니 그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알릭의 앞자리에 앉아 노르먼 백작의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그를 관찰한다.
그를 관찰하다 보니, 어째서인지 힐끔힐끔 쳐다보는 모양새가 되어버린다.
나도 모르게 하는 행동에 당혹감이 들었지만, 그 행동을 고칠 수는 없었다.
“원체 여자를 만나지도 않는 놈이라. 오늘 제 못난 아들놈이 공녀님께 무례를 범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습니다. 하하하”
그의 말에 숨이 턱 막혔다. 무례라는 말에 내가 낮에 그에게 벌인 잘못들이 생각난다.
“알릭경은 무례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노르먼 백작이 다행이라며 안심했다는 말투가 가슴을 찌른다.
얼굴에서 열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끼고 있을 때, 그는 갑자기 일어나며 몸 상태가 안 좋다면서 가버렸다.
나의 무례한 행동이 생각이 나서 가버린 것일까,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사과해야 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들이 들어 노르먼 백작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빠져나와 그를 찾으러 갔다.
식당에서 나와 주위를 둘러봤지만, 그가 보이지 않는다. 벌써 방에 가버린 걸까 싶어 시종들에게 물어 그의 방에 찾아가 봤지만, 그는 없었다.
보이는 시종들을 다 붙잡아 가면서 물어봤지만, 그를 봤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밖으로 나갔을 거라 생각하고 그를 찾기 위해 한참을 주변을 뛰어다니다, 정원에서 슬픈 얼굴을 하고 노란 튤립을 들고 있는 그를 찾았다.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그가 나를 향해 돌아봤다.
물기가 가득한 그의 슬픈 눈을 보자, 그를 찾은 목적은 생각나지 않고 무언가가 겹쳐 보이며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하얗게 변해버린 머리는 제대로 사고하지 못한다. 그가 하는 말에 대답만 하다가 해야 할 말은 하지 못하고 그를 보내주게 되자, 정신이 돌아와 급하게 그를 붙잡았다.
너무 급하게 붙잡아 힘을 조절하지 못해, 그가 그대로 끌려온다. 내가 그를 품 안에 끌어안은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끌어안으며 느껴지는 온기와 그의 몸에서 나는 체취가 머리를 어지럽히고, 부끄러움이 파도처럼 몰려와서 해야 할 말은 전하지 못한 채 도망쳤다.
도망치고 방으로 돌아와 이불을 머리까지 덮고 부끄러움에 몸부림치며 밤을 지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