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화
아이리스
고통스러운 삶의 시작점이 되었던 날이 찾아왔다.
그 삶을 끊어내기 위한 결전을 앞에 두고, 마음을 바람 한 점 없는 날의 호수처럼 고요하게 만든다. 마음 한편에 놓아둔 검을 갈아낸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번처럼 덧없는 삶이 되지 않도록.
보답받지 못하는 삶이 되지 않도록.
강자와의 싸움에 흥분하는 한 명의 전사가 아니라, 형편없이 져버리는 패잔병이 되리라. 그렇기 위해 마음에 놓아둔 검으로, 나의 전사로서의 삶을 베어낸다. 부정한다.
오늘 그녀의 검에 형편없이 지는 패잔병이 되어, 아직은 조금이나마 감정이 남아있을 그녀를 실망시키리라. 파혼하리라.
그렇게 전사로서 부끄러운 생각을 대단한 신념처럼 마음에 새겨 넣는다.
그러고는 그녀가 싫어할 만한 모든 것을 준비한다.
몸을 깨끗하게 씻고 허영심 넘치는 젊은 남자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가벼운 화장을 하고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한다.
분의 향과 촉감에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구역감을 억지로 참아내며, 옷 중에서 가장 화려하며 불편한 옷을 입는다.
옷을 찢어버리고 분을 물로 지워내고 싶은 마음을 다시 한번 칼로 베어낸다.
오늘 나는 허영심 넘치며 실속 없는 쓰레기다.
그렇게 나에게 최면을 걸며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그녀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문 앞에 대기하고 있는 시종에게 시켜 미리 준비해둔 생기 넘치는 붉은 빛이 맴도는 장미를 넘겨받고, 그녀를 기다린다.
55년의 기억을 가진 내가 35년 전의 그녀를 기다린다.
그렇게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때 그 인간도 내려왔다. 그의 불쾌한 시선이 나를 한번 훑더니 이내 얕은 미소를 보인다.
“오늘 같은 날은 좀 꾸미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지, 평소처럼 나왔으면 다시 방으로 보내어 꾸미라고 시켰을 것이다.”
그 인간의 듣기 싫은 말을 흘려들으며, 가볍게 고개만 끄덕인다.
“긴장되겠지만 네가 큰 잘못만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을 거다.”
내 생각을 모르는 그 인간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그런 말을 지껄이며 나의 등을 가볍게 두드린다.
지금 나의 모든 것들이 구역감을 주는 와중에, 그런 말까지 들으니 정말로 속에 있는 것들을 게워낼 거 같아 입술을 지그시 깨물어 참았다.
구역감을 고통으로 억지로 참아내며 시간은 죽이고 있으니, 화려하지는 않지만 은은한 멋이 살아있는 마차가 정문을 통과해 본관 앞에서 멈추고 마차에서 그녀가 내린다.
별관으로 쫓겨나기 전 보았던 그녀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세월이 지나 완숙해진 그녀보다 아주 조금 작고 앳되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보석 같은 그녀의 눈과 표정이. 아름다운 호수 같은 그녀의 머릿결이. 대리석으로 조각한 듯이 완벽하고 잡티도 없는 그녀의 얼굴이, 저번 생의 기억과 마음을 자극한다.
심장이 나의 의지를 벗어나 빠르게 뛴다.
그렇게도 괴로웠는데, 죽을 만큼 아팠는데도 모자란 나는, 그녀를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마음을,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 없다.
미움을 사야 하는데, 그것이 너무 싫고 생각만으로도 아파온다.
이런 미련한 내가 너무나도 바보 같고 짜증이나, 죄 없는 입술을 씹는다.
그런 상념에 빠져있을 때, 그녀와 그 인간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그 인간은 몇 마디 말하고는 웃으며 돌아갔다.
대충 좋은 시간을 보내라는 등의 쓸데없는 말이겠지... 나에게도 그녀에게도 좋은 시간은 없을 텐데
“처음 뵙겠습니다. 알릭 노르먼입니다.”
“아이리스 브란트다.”
무례할 정도의 그녀의 짧은 인사는 여전하구나.
“첫 만남인데 빈손으로 오기 좀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꽃을 준비해 봤습니다.”
나는 좋아하지도 않는 꽃을 좋아한다고 거짓을 말하며, 헤퍼 보이는 웃음을 짓고 그녀에게 준비한 붉은 장미 꽃다발을 건넨다.
그녀는 무심한 표정으로 받고는 뒤의 수행원들에게 넘긴다.
예의에서 한참을 어긋한 행동이지만, 당당하면서 기품 있는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가 모든 것을 정당화시킨다.
그런 그녀는 나의 눈을 바라보며 그때처럼 나에게 검을 던진다. 나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검은 받는다.
“대화는 검으로도 충분하다. 연무장으로 안내하게.”
저번 삶보다 까칠해 보이는 그녀를 연무장으로 안내하며 날뛰는 마음을 가다듬는다.
연무장에 도착하고 불편한 겉옷을 시종에게 맡기고, 사람들을 모두 물렸다.
신성의 검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을 품은 시종들은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었지만, 조용히 물러가고 주변은 고요해졌다.
우리 둘은 마주 보며 검집에서 검을 뽑아낸다.
검이 뽑혀 나오며 울리는 청명한 소리가 나의 마음을 자극한다.
전사로서 살아온 나의 삶이 눈앞의 적을 쓰러트리라 외치고, 사라졌다고 생각한 그녀에게 인정받고 싶은 치기 어린 마음이 지금이 기회라고 속삭인다.
마음이 외치는 것처럼, 내가 그녀를 이기고 인정받을 기회는 과거와 미래를 다 통틀어서도 지금만 한 적기가 없으리라.
그러나 인정받아 무엇 하랴, 지금 그녀에게 남아있는 한 줌의 감정은 얼마 안 가 얼어버리고, 죽어버리고, 잊혀질 것이거늘.
그런 일은 아이들에게 경험한 것으로도 충분하다. 더는 그런 일은 겪고 싶지 않다.
아플 만큼 아팠으니 충분하다. 더 이상의 아픔은 원치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의 마음은 다른가 보다. 흔들림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 이상 그녀를 마주하고 상념에 사로잡히면 계획이 어그러질 것만 같아, 물에 젖은 듯이 무거운 몸을 움직여 선수를 친다.
그녀에게 돌격하여 허리힘도 들어가지 않은 엉성한 자세로 검을 내려친다. 이 정도는 피하고 반격하면 금방 끝낼 수 있을 법도 한데, 그녀는 나를 가늠하기 위해서인지 피하지 않고 검을 맞대어 막는다.
검이 맞닿자 표정 근육이 죽어버린 것만 같은 그녀의 얼굴이 찡그려진다.
아마 짜증과 실망의 감정이겠지, 젊은 적의 그녀는 검에 대해서만큼은 유달리 엄격했으니 당연히 화가 났으리라.
체구와 힘만 믿는 멍청이들처럼 보이기 위해 아무런 묘리도 없이 힘만 주어 내려친다. 그녀는 검을 옆으로 틀어 힘을 흘려버리고, 그녀는 나의 비어버린 품을 파고들어 폼멜로 명치를 유린한다.
몸을 살짝 틀어서 조금이나마 힘을 흘릴 수 있었지만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 대가로 그녀의 힘이 온전히 전해져 명치를 유린한다. 숨이 쉬어지지 않으며 통증은 파도처럼 밀려온다.
검을 떨어트리며 다리에 힘을 빼 쓰러진다.
연기가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며 요동치는 마음을, 전사로서 치욕에 울부짖는 나의 삶의 일부를 끌어안고 숨을 죽인다.
“역시 신성께서는 다른 사람들과 수준이 다르시군요. 졌습니다.”
비웃음만 나오는 실력이면서, 자신의 실력이 아니라 남에게서 이유를 찾는 등신들이나 말할법한 멘트를 지껄이며 그녀를 본다.
그녀는 화가 났는지 얼굴이 살짝 붉어졌고, 이마에는 주름이 자리를 잡았다.
잃어버릴 색이 아직은 남아있는 당신은 화내는 모습도 아름답구나.
그런 생각은 서늘한 칼날이 나의 목 옆으로 드리우며 생각을 쫓아낸다.
“네놈은 내가 우습더냐? 그 정도 연기를 못 알아보는 등신으로 보이는 거냐?”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억지로 얼빵한 표정으로 시치미 떼지만, 그녀의 얼굴은 좀 더 붉어지고 목 옆에 자리 잡은 칼날에서 떨림이 느껴진다.
“하... 나를 정말로 바보로 보는군.”
“저는 정말 그런 적이 없습니다.”
억울한 척 연기를 해본다. 그것이 그녀의 화를 돋우는 데 성공했는지, 그녀는 나의 목에서 검을 치우고는 옷의 단추가 떨어질 정도로 멱살을 강하게 잡아서 들어 올렸다.
“닥쳐라! 네놈의 눈이 나의 검에서 떨어지지 않고, 손 전체에 굳은살이 가득한 인간이 처음 검을 잡아본 사람처럼, 힘만으로 검을 휘두르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말이 나오지 않는다. 너무 멍청한 실수에 대한 당혹감과 석상 같은 그녀가 이렇게까지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의 입을 막는다.
“이번에는 변명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닫는군... 그래 계속 그렇게 해봐라.”
그녀는 나의 멱살을 잡고 있는 상태에서 그대로 나를 던져버린다. 부유감을 느끼며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직감이 경고한다.
땅에 닿자마자 꼴사납게 옆으로 구르며 빠르게 땅을 차서 몸을 일으키고, 내가 있던 자리와 그녀를 시야에 둔다.
옆에는 내가 아까 떨어트린 검이 박혀있었다.
“목숨이 위험해져야 제대로 하는군.”
“아무리 공녀님이시더라도 이건 선을 넘으신 겁니다!”
“나를 능멸하고 선을 넘은 건 너다.”
살기가 더 커짐을 느끼고 옆에 박혀있는 검을 뽑아 들어 휘두른다. 손이 떨려올 만큼 묵직한 반발력을 느껴지는 것을 무시하고, 검을 틀어 사선으로 내려치는 검격을 막아낸다.
그녀는 그 상태에서 검을 밀어 넣어 나의 얼굴을 노려온다. 얼굴을 틀어 피하고 발로 그녀를 차서 거리를 벌린다.
그녀는 거리가 벌려지는 것을 허용할 생각이 없는지 바로 파고들어 찔러온다.
찔러오는 검을 폼멜로 내려찍어 쳐내며, 역으로 그녀를 베어내려고 했지만. 이성이 브레이크를 걸어 폼멜로 검을 쳐내고, 검면으로 그녀를 후려쳐 밀어낸다.
그녀는 밀려나고 바로 자세를 잡았지만, 아까와는 달리 바로 달려들지 않고는 조용히 타오르는 눈동자로 나를 노려본다.
“아직도 나를 능멸하는구나. 왜 베어낼 수 있는 기회를 그대로 버리는 것이냐? 내가 여인이라서 전사로는 보이지 않는 건가? 아니면, 승기를 버려도 될 만큼 내가 나약해 보이는가?”
그 말을 끝으로 그녀의 살기가 일순간 사라지며, 살기로 떨리던 대기가 고요해진다.
“됐다. 무슨 이유이든 상관없다. 끝까지 그렇게 해보거라.”
그녀의 검이 선명한 푸른빛을 뿜어낸다. 오러. 수많이 수련과 전투 끝에 경지에 이른 전사들에게만 주어지는 폭력이자, 아직 나의 몸은 쓰지 못하는 힘. 그런 힘이 그녀의 검에서 펼쳐진다.
지금 들고 있는 검이 나쁘지 않은 검으로 보이지만, 그녀의 검에 닿는다면 몇 합 안 가서 잘려 나가리라.
그녀의 화내는 모습은 처음이라 감은 오지 않지만, 상호 동의 없이 오러까지 사용했으니, 패배를 선언해도 받아들이지 않겠지.
지금의 나에게는 정신에 비해 모자란 육신을 무리시키고 혹사시켜 한순간에 끝내는 것 말고는 선택지는 없다.
미래이자 과거인 내가 얻은 깨달음으로 만든 기술을 준비한다.
양손으로 잡고 있던 검을 오른손으로 가볍게 잡고, 몸속에 자리 잡고 있는 부족한 마나를 깨워, 소량의 마나는 몸의 활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사용한다. 나머지 모든 마나를 왼손에 모아, 대기 중에 퍼져있는 정련되지 않은 마나와 공명시킨다. 공명시킨 마나를 압축해 피부와 하나처럼 만들고 마음을 세운다.
30년이 넘도록 항상 보아왔던 검격이 나에게로 향한다. 모든 것을 베어버릴 것처럼 강맹한 그녀의 검을 왼손으로 잡는다. 아니 엄지와 나머지 손가락 사이로 끼워 넣는다.
거친 오러와 만나 마나와 손이 비명을 지르지만, 무시하고 그녀의 오러와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동화시키고 굳히며, 흐름을 뒤틀어 모든 것을 공기 중으로 흘려보낸다.
그녀의 검격은 길이 막혀 파괴적인 움직임을 멈췄다.
그것을 보고 눈이 흔들리는 그녀의 목에 검을 들이밀고, 그녀를 무너트리기 위한 말을 쥐어 짜낸다.
“검날을 잡힐 만큼 미숙한 여인을 전사로 봐줄 수는 없습니다. 공녀님”
어릴 때부터 전사로서 교육받고 자란 그녀의 삶과 노력을 정면에서 부정한다.
그녀와 이어지지 않을 미래를 위해, 그녀가 내가 보기도 싫어질 만큼 미워하기를 바라며, 상처가 되어 밀어내기를 바라며 그녀의 자존심을 짓밟는다.
이 말이 효과가 있는지, 잡고 있는 검날로부터 떨림이 전해져온다. 분노로 붉어진 얼굴은 창백해졌다.
입은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지 열렸지만, 금방 다물어지고 죄 없는 입술만을 물어뜯는다.
더 보고 있으면 가여워 보이는 그녀를 끌어안아 버릴 거 같아, 등을 돌리고 연무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는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와 중얼거리는 소리에 마음이 흔들려, 혹사시켜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왼손을 억지로 꽉 쥐어 아픔으로 신경을 돌린다.
생살을 찢는 고통이 밀려오지만, 어째서인지 손보다 가슴이 더 아파온다.
당기는 것만이 전부였던 삶에 밀어내고 망가트리는 경험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을 만큼 더러워, 오늘 일로 한평생의 첫사랑이자, 짝사랑이었던 그녀를 더 밀어내지 않아도 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