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화
상념
“하아..하아..하...”
몸을 혹사한 사람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쉰다.
이렇게 숨을 몰아쉬어도 나의 몸은 진정하지 못하고, 숨을 갈망하며 떨려온다. 그렇게 한참을 숨을 몰아쉬고 나서야 떨림이 멈췄다. 그제야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어두우며 푸르스름한 빛이 감돌고 있는 새벽녘. 수수하면서 제법 넓은 방이 눈에 들어왔다. 가구는 별로 없고 벽에 장식된 검 몇 자루만이 장식품으로 있는, 귀족치고 수수하고 검소한 방.
이 흐릿하게 익숙한 방은, 결혼하기 전 본가에 있는 내가 쓰던 방이다.
나는 이 광경을 인지하면서도 머리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낡고 삭아버린 나무 바닥처럼 삐걱거린다. 삐걱거리는 머리를 활동시키기 위해서, 지금 상황이 꿈이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좀 강하게 뺨을 쳤다.
‘짝’하는 소리와 함께 약간의 화끈함과 함께 얼얼함이 느껴졌다. 그제야 꿈이 아님을 인지했다.
하지만 여전히 머리는 삐걱거리며 생각이 잘되지 않는다. 삐걱거리는 머리는 조금 지나면 어느 정도 돌아오리라 생각하고 몸을 확인했다.
전성기에 한참 못 미치지만 죽기 직전 병든 육신보다 활기가 넘친다. 훈련과 전투에서 얻은 훈장 같은 흉터들은 없고, 전사치고 매끈한 피부가 자리해있다. 나의 상태를 더 자세히 확인하기 위해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거울에는 병들고 늙어버린 실패자는 없고, 청년이라기에는 아직 풋내 나는 어릴 적 나의 모습이 자리해 있었다.
그 모습에 삐걱거리던 머리는 조금씩 돌아가며, 생각을 한가득 채운다. 그중에 말이 안 되는 생각을 하나씩 버리니, 그나마 타당한 두 가지 생각이 남았다.
“그 모든 것이 전부 꿈이었나, 아니면 펜던트가 소원을 이루어 준 것인가?”
내가 경험한 것이 그저 하룻밤의 꿈이든, 펜던트가 소원을 이루어 준 것인지는 둘 중 무엇이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지금이 현실이고 그 모든 것들이 꿈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했다.
그 사실에 감사하면서도, 생생한 그 기억들이 아픔이 되어 다가온다. 표출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올라오며, 눈에는 물이 가득 차오른다. 차오른 물과 감정은 터져버린 둑의 물처럼 하염없이 흘러나온다.
아이리스 그녀를 사랑하며, 언젠가 나의 진심이 전해질 거라 생각한 미련한 나날들에 대한 후회를
그녀에게 어울리기 위해 노력하며 참아왔던 아픔들을
세상이 내게 허락해준 가장 큰 기쁨이자, 삶의 원동력이 되어준 아이들을 다시 보지 못한다는 슬픔을
아이들에게 다시는 세상을 보여주지 못하는 미안함
그녀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무엇 하나 해줄 수 없었던 나의 무능함에 대한 절망을
꿈이길 바란 소원은 이루어 주었으면서, 처음 소원을 빌었을 때 저주를 풀어주지 않은 펜던트에 대한 원망을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와 행복해지리라 생각했던 멍청이의 썩어버리고 문드러진 감정들을 눈물과 함께 토해냈다.
감정을 토해내면 토해낼수록 아팠다.
사랑했을 뿐인데, 그저 그녀를 사랑했을 뿐인데 너무 아팠다.
전투에서 얻은 그 어떤 상처들보다 아팠다. 나 같은 멍청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컸다.
눈물과 함께 계속 토해내도 변함이 없을 만큼 컸다.
그렇기에 잊으리라, 찰나의 꿈으로 여기리라.
보답받지 못할 사랑을 하지 않으리라.
닿을 수 없는 꿈을, 오지 않을 봄을, 나에게 허락되지 않을 봄을 희망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다짐하며 잊으려 해도, 이제는 보지 못할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일렁이는 것이 나의 마음을 찢어발긴다.
“에반아, 엘리야 미안하구나... 아버지가 못나서, 너희에게 세상을 보여주지 못하는구나.”
이제는 태어나지 못할, 나의 삶에 최고의 선물이었던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다.
새벽의 어스름을 태양이 몰아내는 아침이 찾아오고 나서야 울부짖음은 흐느낌으로 변했고, 한참을 흐느끼고 나서야 간신히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린 몸과 너무 울어서 붉어지고 퉁퉁 부어버린 눈이 거울에 비쳐 보였다.
누군가에게 보여줄 모습이 아니라 욕실에 가 한참 동안 몸과 마음을 함께 씻어낸다.
씻고 돌아오니 방 앞에는 집사장인 노베르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노베르트 뭐 하고 있는가?”
“공자님. 가주님께서 점심 식사에 참여하라는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옷만 입고 금방 가지.”
말을 전한 노베르트는 바로 돌아갔고, 나는 방에 들어가 적당히 활동하기 편한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고 식당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보이는 시종들의 분주하고 생기 넘치는 모습이, 적막했던 공작가에 있었을 적과 대비된다. 그들이 날 공자님이라 부르며 인사하는 모습이, 그 기억들은 이제는 찰나의 꿈이었음을 말해주는 거 같아 기꺼웠다.
화려하게 장식된 길쭉하게 넓은 식탁에는 가주를 위한 상석과 그 옆자리에만 식기구만이 준비되어 약간 허전해 보였다.
나는 자리에 앉아 아버지를 기다리며, 너무 생생했던 꿈과 현실의 기억이 뒤섞인 기억을 찬찬히 정리해갔다.
35년 전, 20살에 큰 형은 정계 진출을 위해서, 작은 형은 사업을 배우기 위해 둘 다 수도로 갔고, 어머니는 작년에 돌아가셨다.
그렇게 지금 상황을 정리하고 있는지 얼마 안 되어, 나를 팔아먹은 인간이 도착했다.
아니. 꿈에서 나를 팔았던 아버지가 도착했다.
아버지에게 가볍게 예를 표한다.
아버지는 손짓으로 예를 받으며 조용히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하셨다. 아침으로 나온 수프와 갓 구운 흰 빵을 반쯤 먹었을 때, 아버지는 식기를 내려놓으시고 나를 쳐다보면서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오늘 할 말이 있어서 불러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꿈에 사로잡혀 신경 쓰지 못했지만,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아버지가 처음으로 식사에 참여하라는 명령에 의문을 품으며 경청하였다.
“너도 알다시피 너희 형들은 모두 약혼자를 내가 맺어주었는데, 아직까지 너만 맺어주지 못했더구나.”
“그렇습니다.”
평소에 나에게 관심도 없던 아버지가 나를 위하는 척하며 약혼에 관해 이야기하는 모습에, 나는 불길한 생각이 스쳐 지나가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억지로 불길함을 밀어냈지만, 그 불길함은 얼마 가지 않았다.
“운이 좋게 브란트 공작가에서 혼담이 들어왔다. 아니 정확히는 이미 확정됐다고 보는 게 맞겠지.”
그 말은 불길함을 지우고, 나에게 절망을 주었다. 절망감에 허덕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걸 보고 아버지는 착각이라도 했는지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너무 놀라서 아무런 말도 안 나오는가 보구나. 그래 그럴만하지 우리 가문도 제법 괜찮지만, 브란트 공작가에서 혼담을 들어오기에는 급이 안 맞으니. 이유는 모르겠지만, 브란트 공작가에서 너를 지목하며 혼담을 꺼내왔다. 이미 계약서도 작성했으니 이의는 받지 않겠다.”
그 말을 끝으로 아버지... 그 인간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졌다. 그 인간이 가고 한참을 절망감에 허덕이며 부정을 하고 나서야 의미 없음을 깨닫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 방으로 몸을 움직였다.
머리를 굴려 생각을 쥐어짜네 봤자 뾰족한 수는 생각나지 않는다.
“하 그냥 조용히 가문에서 빠져나와 도망칠까.”
답답한 마음에 이런 소리를 했지만, 날 팔아먹은 인간이 입에 들어온 먹이를 놓치려 할 리가 없다. 도망친다면 병사를 풀거나 정보 길드를 고용해서라도 나를 찾으려 들 것이다. 기반이랑 지원해 줄 사람도 없는 내가, 그 모든 것들을 피해서 도망칠 수 있을 확률은 거의 없다.
“그저 우연히 꿈과 비슷한 일이 일어난 거고, 그 이후에는 전혀 다르지 않을까?”
도망치듯 긍정적인 생각을 짜내어 봤지만, 말라비틀어진 나의 긍정적인 마음은 그것을 끝으로 작동을 멈춘다. 긍정적인 생각이 사라지고, 부정적인 생각들만이 머리에 범람한다.
부정적인 생각들은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커져가고, 함께 답답함 또한 커져간다.
몸이라도 움직이면 조금 나아질까
그리 생각하며, 나 혼자 사용하는 연무장으로 이동했다.
꿈... 아니 저번 삶에서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은 목검을 잡는다.
이 삶에서 매일 사용하던 목검의 감촉은 무척이나 낯설게 다가오며, 꿈이 아니라고 외치는 소리에 어지러움과 함께 속은 울렁거렸다.
애써 그 모든 것들은 뒤로하고, 나의 몸을 한 부분도 빠짐없이 인지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한다.
정치나 사업을 위주로 하던 가문에서 검을 사랑하는 별종으로 태어나, 별다른 지원 없이 노력만 들이부어 만든 몸은 어설펐다.
손은 훌륭한 전사의 손이지만, 자세를 객관적으로 인지하지 못해, 잘못된 자세가 습관이 되어 몸의 균형이 무너트렸다. 몸을 교정하는데 꽤나 고생할 것이 뻔히 보여 착잡했지만, 꿈이 되어버린 미래에서 갈고닦은 기술과 깨달음은 머리에 남아 있으니 괜찮다. 시간을 들여 수련하면 어지간하면 스스로 지킬 정도는 되리라.
그렇게 실없는 생각을 하던 와중에 그녀와의 첫 만남이 생각났다.
아이리스 그녀는 나에게 검을 던져주며 ‘대화는 검으로 충분하다.’라고 했지.
그때 그녀에게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주면 파투 나지 않을까?
모르겠다. 확신은 할 수 없다.
하지만 해볼만 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끔찍한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낫다.
새로이 주어진 삶에, 목표가 생겼다.
끔찍한 운명에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리라. 그 끝에 내 모든 것들을 잃더라도 그러리라.
그것이 아무것도 바랄 수 없는 공허한 사랑보다, 아프기만 한 사랑보다, 기약 없는 봄을 기다리며 죽어가는 것보다 행복하리라.
그런 상념과 함께 다시 나약한 육신을 담금질하는 것에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