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화
악몽
꿈을 꾸었다.
내 삶을 잠식하는 악몽을.
그 악몽은 처음에는 달콤했다.
북부의 수호자 브란트 공작의 유일한 혈육이자, 신성이라는 이명을 얻은 여인. 아이리스 브란트와 가문 간 협의로 약혼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믿지 못했다. 나의 가문인 노르먼 백작가는 브란트 공작가와 약혼을 논할만한 급도 안되고, 나는 대외활동조차 하지 않는 귀족가의 흔한 삼남이다.
그럼에도 이 약혼이 성립된건, 유일한 후계자 아이리스 브란트가 여인이라, 정치적인 영향력이 없는 데릴사위가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가능했다.
아무런 가치도 없는 기둥서방이 된다는 소리였지만, 동경하는 여인과의 약혼한다는 기쁨은 퇴색되지 않고 오히려 커져만 갔다.
기쁨으로 맞이한 첫 만남은, 약혼자들의 첫 만남이라기에는 북부의 겨울처럼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북부인의 특징인 눈처럼 흰 피부,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푸른색의 머리카락이 아름답게 흔들리고, 금을 녹여서 만든 것만 같은 아름다운 금색 눈동자. 모든 것이 완벽한 아름다움이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에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으며, 깊이를 알 수 없는 황금빛 바다와 같았다.
인사를 나눌 때 들린 그녀의 목소리는 북부의 바람처럼 삭막했다.
인사를 나누고 그녀가 처음으로 한 말은 '대화는 검으로 충분하다.'였다.
약혼자들의 첫 만남에서 첫 말로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나는 신성이라고 불리는 그녀와 검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검을 든 자로서 기쁨에 겨웠다.
검을 나누며 그녀가 보인 검에 나는 마음을 빼앗겼다. 아름다우면서 군더더기 없는 검로에, 갈고닦은 나의 검이 갈 수 있는 길은 점점 막혀가며 나의 패배가 목전에 드리웠지만, 이 상황마저도 즐거우며 설렜다.
한 명의 검사로서 그녀의 앞에 서서 검을 맞대고 있음이, 신성이라는 그 이름의 무게가, 그녀가 갈고닦은 검의 무게가 느껴져 더욱 가슴이 뛰었다.
얼마 안 가서 나의 패배가 결정되었다.
“나쁘지 않았다.”
검을 맞대고도 흐트러짐 하나 보여주지 않은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는 돌아갔다.
그녀가 떠난 간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대련하던 사이 잠깐 보였던 웃음이라 보기 힘들 정도로 약간 올라간 입꼬리와 생기 넘치는 눈, 그리고 압도적인 실력의 검술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을 곱씹는다.
약혼자들의 첫 만남으로 삭막하고 이상한 만남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나쁘지 않았다는 말에 가슴이 미친 듯이 뛰며, 더 정진하면 그녀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나의 바람이 이루어질 날은 오지 않았다.
그녀의 실력은 일취월장해 한계를 모르는 천재의 면모를 보여주며, 나는 닿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나아간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나는 그녀의 옆에 있을 수 있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의 마음에 내 마음이 한 줌이라도 닿을 수 있도록 모든 걸 쏟아부었다.
남편으로서 그녀의 위상에 흠결이 되지 않도록 배움을 얻을 수 있으면 모든 배움을 구하고, 아랫사람들에게는 엄하면서도 온화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자세, 몸짓, 말 하나하나 의식하며 행동했다.
검술 또한 포기하지 않고 갈고닦았고, 골칫덩어리인 야만인들을 토벌할 때는 가장 앞에 서서 몸을 사라지 않았다.
첫 살인을 경험했을 때, 뿜어져 나오는 피의 열기와 쏟아져 나오는 창자들이 선사하는 역함도 참아냈다. 매일 밤 생각나는 그 감각에 몸부림쳤지만, 드러내지 않았다. 혼자 끌어안고 감내하였다. 상처를 입어도 아픔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살아가며 모든 것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녀의 웃음은 고사하고, 감정의 편린조차 볼 수 없었다.
내가 아직 부족하고 미숙해서 그런 걸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아픔을 참아낸다.
처음 입은 옷처럼 어색한 생활이 조금은 익숙해져 갈 때, 나와 그녀를 닮은 아들 에반이 태어났다.
아직도 에반이 태어난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아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작고 가벼우면서 사랑스럽다는 사실이, 아이의 따듯함이 주는 감동과 기쁨에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고생했을 그녀를 봤다. 첫 만남부터 한결같이 무표정한 얼굴이,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조금 슬퍼 보였다.
그것이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는 그녀의 감정이었다.
에반이 태어난 지 2년이 지나고, 이번에는 그녀를 많이 닮은 딸 엘리가 태어났다. 엘리가 주는 기쁨은 에반이 주었던 기쁨과 또 다르면서도, 처음처럼 내가 감당하기 힘든 큰 기쁨을 주었다.
또 세월이 지나 누워서 울거나 웃기만 하던 아이들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이 사랑스럽고, 한참 호기심이 많은 개구쟁이들로 커버렸다.
걸어 다니기만 해도, 아빠라고 불러주기만 해도, 내 마음에 다 담아내지 못할 만큼 기쁨을 주는 사랑스러운 아이들. 그런 아이들에게 그녀는 얼굴조차 잘 보여주지 않았다.
그 사실에 불만이 많았지만, 별수 없었다.
10년 동안 같이 살았지만 웃는 모습은 고사하고, 에반이 태어날 때를 빼고는 감정의 편린조차 보이지 않는 석상 같은 그녀를, 일에 중독된 사람처럼 살아온 그녀를 이해하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렇기에 불만을 삼키고, 아이들이 그녀의 빈자리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사랑을 쏟아부었다.
그저 아이들이 행복하고 건강하길 바라며 세월을 보낸 나에게, 지독한 겨울이 와버렸다.
어릴 때는 밝고 웃음이 많던 아이들은 어느 순간부터 웃음과 감정 표현들이 적어지더니, 그녀처럼 얼음같이 변해버리고 거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느꼈지만,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이유조차 알지 못했다.
나는 그 이유라도 알고 싶어 매일 빼먹지 않던 훈련조차 등한시하며, 서고에 있는 모든 책을 탐독했다. 그렇게 서고의 모든 책을 탐독하다가, 가주들의 일기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브란트 가문은 초대가주부터 저주를 받았었다. 브란트 가문의 핏줄들은 성장하며 마음은 점차 죽어가 감정선이 옅어졌고, 대가 점차 지나자 저주가 더욱 심해졌는지 감정 자체를 느끼지 못한다고 적혀져 있었다.
일기를 더 보면 감정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던 초기의 가주들은, 이 저주를 해주 하기 위해서 수많은 방법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처음으로 감정 자체를 느끼지 못하게 되어버린 가주는 감정이 없는 편이 가문을 지키기에, 북부를 수호하기에 더 유리하다며 저주를 받아들였다.
그 이후로는 가문에서 해주 법을 찾는 움직임은 없어졌다.
그 이야기를 보고는 치가 떨려왔다.
감정이 없고 의무만이 있는 삶이 어찌 사람의 삶인가. 마법사의 명령을 무조건 따른다는 점을 빼면 마법사가 만든 골렘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런 끔찍한 삶과 저주에서 그녀와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나의 머리를 지배했다.
그 이후부터는 그녀와 아이들의 웃는 얼굴을 보기 위해서, 자식들에게 이 저주를 끝까지 넘겨주기 싫어 발버둥 쳤다.
내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사용해서 해주와 관련된 모든 것을 탐구하고 찾았다. 하지만 찾아낸 모든 방법은 실패했다. 모든 방법이 실패한 후 지푸라기 같은 전설에도 손을 뻗어보고, 여러 가지 신비가 도사린다는 야만인들과 이종족들이 사는 미지의 땅에도 찾아가 봤지만, 의미는 없었다.
그렇다 하여도 어딘가에는 방법이 있으리라 생각하며, 희망을 버리지 않고 더 노력했다. 하지만 그 결말은 그녀와 자식들에게 의미 없는 짓 하지 말라는 소리를 듣고, 별채로 쫓겨나 미쳐버린 사람으로 취급받는 신세가 되었다.
나의 수발을 들어줄 최소한의 시종들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별채에서, 그녀와 아이들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하지만 몇 년째 그들은 찾아오지 않는다.
이제는 그들에게 나는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헛된 희망을 꾸었음을 알게 되었다.
시간은 흐르고 55세가 되었다.
55세. 일반 평민이라면 여러 가지 이유로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 귀족이라면 몸은 쇠약해졌지만, 아직 여력이 남은 나이. 검을 든 자들에게는 전쟁이나 사고로 죽지만 않으면, 비 오는 날 혹사시킨 몸의 뼈마디가 쑤시고 몸의 전성기가 끝났음을 여실히 체감하지만, 아직 한창이라며 호탕하게 웃어넘길 나이.
그런 나이에, 나는 죽어가고 있다.
마음이 병들어서일까, 아니면 해주법을 찾으며 여러 가지 시도 중에 저주를 얻기라고 한 것일까
잘 단련된 나의 육신은 병자의 몸처럼 볼품없이 말라서 보기 흉하며, 눈은 생기를 잃었고 그 아래에는 짙은 어둠이 자리를 잡았다. 제국에서 흔한 나의 갈색 머리는 볼품없는 노인과 같은 백발로 탈색되었다.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느낀다.
의원과 신관을 부를 수 있었지만, 더 살아가는 것에 의미를 느끼지 못해 부르지 않았다. 그저 삭막하고 고요한 이 별채가 나의 관으로 어울리다 생각하여, 이곳에서 죽기로 결정했다.
빛바랜 세상에서 나의 끝을 기다린다.
그렇게 나의 임종을 기다리던 와중에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펜던트가 보였다.
소원을 이루어 준다고 하지만 정말 소원이 이뤄진 사람은 없는 펜던트. 속는 셈 치고 소원을 빌고 기도도 해봤지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 대충 방치해놨었다.
그런 펜던트가 어째서인지 별관에 있는 내 눈앞에 어른거린다.
죽을 때가 되어서인지 아니면 남은 미련이 커서 헛것이 보인 건지 모르겠지만, 마지막까지 의미 없는 내 삶에 퍽 어울린다 생각하여 마지막으로 소원을 빌었다.
“내가 죽은 이후라도 아이리스 그녀와 에반, 엘리에게 걸린 저주가 풀려 좋은 일이 있으면 행복하게 웃고, 슬픈 일이 있으면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며, 이 세상을 만끽했으면 좋겠구나. 그들의 마음을 얼려버린 겨울의 끝이 왔으면 좋겠구나.
... 그렇지 못한다면 차라리, 이 모든 것이 찰나의 꿈이었으면 좋겠구나.”
순수하게 그들을 행복을 기원하는 소원을 빌고 싶었지만, 삶에 대한 후회와 회의감이 사족을 붙였다.
한 여인을 사랑한 것을 결말이, 그녀와 아이들에게 버려지고 고독 속에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아팠기에, 차라리 처음부터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런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들처럼 나도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면, 아프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에 빠지며, 한 줌의 눈물과 함께 나의 병들고 늙어버린 육신에 남아있던 한 줌의 힘마저 빠져나간다. 의식은 아득한 어둠 속으로 가라앉으며, 나의 아프기만 한 인생은 끝이 난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처녀작이라 미흡한 부분이 많겠지만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