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찾았다 -->
109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나올 뻔 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바라본 뒤쪽.
그곳에는 언제나 그랬다는 듯 한 여자가 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유희야...? 정말 유희 맞아?”
“그럼 저 말고 다른 여자 찾으러 오셨어요?”
그 순간 다시 울컥 하고 말았다.
너무나도 그리운 얼굴, 너무나도 그리운 목소리.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보고 싶었어”
“저두요. 와주셔셔 감사해요”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기쁜 일인데도 계속 안쪽에서 뭔가가 터져나올 것 같아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잠시동안 우린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데, 지금은 먼저 여기서 나가야 되지 않을까요?”
“아참! 그랬지”
계속 여기 있다간 이 성이랑 같이 적진 한복판에 떨어지게 될 지도 모른다.
이젠 시간이 정말 없어.
“뭐하시는 거에ㅇ... 꺄악!”
“꽉 잡아!”
검으로 힘을 주어 창 쪽에 붙어있는 창살을 박살내버렸다.
두 손으로 유희의 허리를 붙잡고는 곧장 창 밖으로 뛰어내렸다.
“꺄아악-!”
엄청난 맞풍이 얼굴을 때렸다.
아마 이 상태로 추락했다간 빼도박도 못하고 낙사다.
하지만 스킬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거지.
그림자도약을 사용해 위쪽으로 치고올라 시간을 번 다음 가장 주변의 나무에 유화술을 사용했다.
데미지 없는 깔끔한 착륙.
그와 동시에, 캣츠의 본거지성은 저 너머 어딘가로 사라져갔다.
“푸흡, 진짜 무모하다니까”
유희가 작게 실소를 지었다.
“이제 방해될만한 것도 없지? 너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정말 많아”
“알아요. 그런데, 지금 얘기하지는 말아 주실래요?”
“응?”
“여기서만 계속 있으면서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나중에 현실에서 만나 직접 얘기하고 싶어요”
“아아”
현실에서나 게임에서나 무슨 차이냐 싶겠지만, 사실 게임을 조금만 이해하고 있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게임에서의 모든 대화는 서버에 기록이 남는다는 걸.
아무에게도 공개되지 않는 다곤 하지만 그래도 그걸 이해한 이상 프라이버시가 있는 대화를 하기엔 꺼림칙해질 수 밖에 없다.
“서울 RIG 아파트 106동 앞에서 만나실래요? 지금은 밖에 어두을 테니까 현우 님고 못 오실거 같고...”
“왜 못가? 그냥 지금 가도 되는데?”
“네?”
유희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 시간에 손님을 맞아야한다는 당황보다는, 내가 이 시간에 올 수 있냐는 듯한 표정.
“RIG면 서울에 한 곳 밖에 없잖아? 우리 집에서 걸어서 10분도 안걸려. 아, 혹시라도 너가 불편한거면...”
“아니에요! 저도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와주세요”
그녀가 방긋 웃었다.
“조금만 기다려! 바로 보러 갈테니까!”
“네!”
대화는 길지 않았다.
나는 곧장 접속을 종료했다.
캡슐을 나오자 보이는 창문 밖은 어두웠다.
“벌써 야밤이다. 뭐, 들어올때부터 저녁이긴 했다만...”
“감사합니다! 저 이만 가볼게요!”
“어, 어어... 뭘 저렇게 급하게 가는거지”
대답해줄 여유도 없이 바로 빌라를 나섰다.
지금은 얇은 셔츠에 바람막이 하나 걸친 상태.
차가운 가을바람이 몸을 시리게 했지만 전혀 상관하지 않고 곧장 RIG를 향해 달렸다.
예전에 어디서 봤었는데, 어디서 봤더라... 어느쪽이었지?
“이쪽이구나...”
벽면에 RIG라고 쓰여있는 아파트 단지를 발견하자 기분이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이제 정말 거의 다 왔다. 유희를 만나기까지.
애매한 밤시간대라 경비아저씨도 안보이니, 바로 아파트 정문으로 들어가 106동을 찾았다.
정문에서 조금 멀리 있는 구석의 큰 단지 건물.
여기까지 왔다.
“유희는 어디지?”
큰소리로 불러볼까 했지만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외부인 주제에 밤중에 괜히 상관없는 사람들 깨울까봐.
“정말 와주셨네요”
유희는 동 건물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를 향해서, 조금씩 다가갔다.
“진짜 오랜만이다. 나 눈물 나올것 같아”
“에이, 무슨 소리세요. 직접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잖아요?”
“그건 그렇네. 그럼, 처음 뵙겠습니다! 잘부탁드려요!”
“푸흡,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 처음 뵙겠습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잠시동안 우린 서로를 향해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러고 있으니, 게임에서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생각나 장면처럼 스쳐갔다.
이번에는 정말 억누를 수가 없었다.
“뭐, 뭐하시는거에요?!”
“미안해. 지금까지 너무 긴장해있었는지, 오늘은 그냥 풀려버릴것 같아”
유희의 품에 바짝 안긴 채로 나는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너무 무서웠어. 어떻게 만난 인연인데, 고작 그렇게 놓쳐버리는건가 하고”
“에이, 그렇게 잃어버리면 안되죠. 그래서 결국, 다시 이렇게 찾아주셨잖아요?”
“나 이제 확실히 알았어. 이젠 내 마음속에 너밖에 없다고. 너 말고 다른 사람은 안 보여. 앞으로도 너밖에 없을거야”
한참동안 제대로 전하지 못했던 진심을, 지금 전했다.
“절대로 안놓을 거야. 놓치게 하지도 않을거니까, 너도 놓치지 말아줘”
한구석에 찝찝하던 마음이 싹 쓸려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싫어요”
“응?”
“단순히 놓치지 말고 계속 같이 있고, 그런 것 만으로는 싫어요”
잠깐동안 아무생각도 들지 않았지만, 이내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
“현우 님, 우리 연애할래요? 게임에서만은 말고. 진짜로 연애할래요?”
“너 진짜... 왜 그래”
오늘 정말 날 죽일 생각이구나.
그래, 이런 식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응, 하자!”
아까부터 이상했다.
기쁜데 슬프다. 웃고 싶은데 눈물이 난다.
언젠가부터 유희도 마찬가지였다.
“흑, 흑…”
“울지마세요. 자꾸 그럼 저까지...흑흑”
웃는 표정에 번진 눈물바다.
보는 사람도 없이 아파트 한구석에서, 그녀를 바라보며 다짐했다.
앞으론 절대 그녀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 * *
서향왕국 가테즈를 손쉽게 점령했다.
소식을 듣자하니 레버튼의 병력이 전부 서향왕국쪽으로 갔던 상태라 이쪽도 쉽게 점령했단다.
두 왕국의 기세에 떠밀려 물타기 하듯 참가했던 중앙왕국 에란젤은 양쪽이 무너지자 곧바로 항복을 선언했다.
그렇게, 우린 승산이 없다고 여겨지던 전쟁에서 다시 한번 승리했다.
“일단 케인 포함해서 캣츠와 연관성이 확실해진 플레이어들만 전부 지명수배 걸어. 랭커급들은 포상금 30만 골드, 그 외에는 8만 골드씩”
엄연히 말하자면 벨라도 캣츠에 소속된 녀석이라는게 확실해지긴 했지만, 녀석이 걸리면 카지노 수익을 받을 수 없으니 그냥 남겨놨다.
“그러고보니, 아스칼을 제외하면 이제 에킬라가 전 지역을 전부 통일한 건가요?”
“그들이 위쪽 영토를 탐내지는 않겠다 했으니, 아마도 그렇게 되겠지”
동향왕국과 서향왕국의 수도는 불타 완전히 사라졌다.
현재는 치열한 전쟁의 흔적이 남았을 뿐이고, 어차피 이젠 왕국도 무너졌으니 수도도 필요없겠지.
이젠 더이상 남향왕국이 아니다.
아스가니아 대륙을 통일한 ‘대제국’ 에킬라가 된 것이다.
“비록 삼위 연합군과 대항군의 전쟁은 끝났지만, 우리들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네”
“캣츠의 본거지성은 다시 달아나버렸으니까요”
그 증거로, 엘카피의 함교에 꽂혀 있는 카르킨의 검은 아직까지 버프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아직 전쟁이 마저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차라리 엘카피랑 같이 쳐들어갔었다면 유희를 데리고 빠져나오자마자 바로 부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는데.
“어디로 이동했는지 알 방법은 없는거죠?”
“영토가 전역으로 확장되고 어디서든지 탐색마법을 쓸 수 있게되었지만, 아직까지도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네”
지도에 걸리지 않는 다는 건 두가지 가능성이 있다.
애초에 아스가니아 자체를 벗어났거나, 성 전체에 은신마법을 둘렀거나.
전자는 너무 가능성이 막막해보이고, 후자의 가능성이 높았다.
“탐지 능력이 있는 고위 마법사가 필요하겠네요”
“엘 캐피탄에는 마법 증폭기가 있으니, 탐지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자만 있다면 훨씬 수월할 걸세”
엘카피에 마법사를 태워 대륙을 돌아다니며 탐지하겠다는건가.
“증폭되면 범위는 얼마정도 됩니까?”
“개인의 역량에 따라 다르겠지만, 함선의 시야에 닿는 곳까지 정도 될 걸세”
꽤 넓네.
일단은 국왕, 아니 황제와의 대화를 마치고 왕성을 나섰다.
“뭐야, 다들 모여있었네?”
“간만에 일도 다 끝났는데, 오늘은 기념식이라도 해야지!“
유희는 물론이고 테오, 승현이와 수아, 엔초까지.
정말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모두가 다 한자리에 모여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는데도, 서로 다 모인 건 이번이 처음이네”
“그러게요”
“오늘이라도 모였으면 됐지! 하마터면 게임 접을 때까지 한번도 못 만날 뻔 했잖아”
갑자기 웃음바다가 되었다.
“자 그럼 어디 술집 같은데 빌려서 파티할까?”
“에에, 저 아직 미성년잔데요?”
아. 그러고보니 유희가 있었구나.
보통 청소년 이용불가는 만 18세 초과자로 18+로 표기하거나, 만 19세 미만으로 19 딱지를 붙히는 것이 대부분.
그런데 워랜드는 청불이라고 해놓고도 만 18세 ‘미만’ 이용불가라는 해괴한 딱지를 붙혀놨다.
결국 고3인 그녀는 아슬아슬하게 워랜드를 플레이할 수 있다는 것.
근데 과연 그게 주류에서도 똑같이 허용이 될까?
“애초에 뇌에 작용하는 방식이 달라서 미성년자 플레이어라고 해도 술마셔도 된댔어요. 그러니까 같이 가시죠!”
“오오, 승현이 조금 똑똑한데?”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가길 희망하는가 아닌가이지.
다행히 유희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좋아요! 한번 가볼래요!”
“그럼 다 결정된거죠?”
“그나저나 바에서 6인테이블 잡으려면 꽤 깨질텐데, 돈은 누가 내쥐이이?”
테오가 일부러 비꼬는 듯 말끝을 올리며 살포시 나를 쳐다봤다.
“그러고보니 저도 요즘 장비 사느라 돈이...”
“저도... 전부다 금고에 넣어놔서...”
“그러고보니 현우 오빠, 요즘 돈 많지...?”
자연스레 모든 시선이 내게 쏠렸다.
심지어 유희까지 옆에서 말없이 날 쳐다보고 있네. 맙소사.
“장선우 저새끼, 진짜 마음에 안들어”
“어허! 이젠 무려 여친까지 있으면서 당당히 앞에서 욕해도 되는거야?”
“…”
진짜, 유희만 없었어도 당장 저 놈의 주둥이를...
“어라 잠깐? 무슨 메세지가 뜨는데요?”
갑자기 광장에 모여있던 플레이어 전원에게 시스템 메세지가 나타났다.
[제국 이벤트 : 수호신의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타이탄 시대 이후 수천만년, 아스가니아 대륙이 다시 통일되었습니다!
태초부터 아스가니아를 감시하던 수호신의 오른팔 이데클로가 대륙통일을 성공시킨 자들의 능력을 시험하고자 합니다]
[6인 파티를 결성해 이데클로를 쓰러트리십시오. 제일 먼저 클리어하는 파티에겐 막대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이벤트 형식: 파티 보스 챌린지]
“정말 오랜만에 보스 챌린지네”
워랜드에서 가장 사랑받는 이벤트들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좀처럼 드문 이벤트라 나도 이 캐릭터로는 한번도 못 만나봤지만.
텔레포트 포인트 주변이라면 어느 곳에서든 참여 가능.
들어가는 순간 들어온 인원수에 상관없이 파티원 6명이서만 보스를 상대하게 된다.
예를 들어 600명이 들어간다 하더라도, 안에서 파티원끼리 묶여 100개의 파티가 100명의 보스를 상대하게 되는것이다.
보상도 쏠쏠한데다가, 다른 사람들의 기록을 갱신하는 재미로 인해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는 이벤트이다.
“어떻게 할래? 마침 우리도 딱 여섯 명이네”
형식적으로나마 질문은 했지만, 사실 이미 답은 정해져있는거나 마찬가지.
“뭐 굳이 물어볼 필요가 있어? 우리야 당연히 찬성이지”
“현우 돈 안깨져서 좋겠다. 쳇, 조금만 더 늦었으면 바에서 엄청 얻어먹을 수 있었을텐데”
“저도 좋아요. 오랜만에 같이 사냥하면 좋을 거 같은데요?”
유희까지 해서 전원 찬성.
의견은 속전속결로 모였다.
“좋아, 그럼 가자!”
========== 작품 후기 ==========
완결까지 얼마 안 남은 기념! 연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