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스 드라이버 -->
99화
“대놓고 검을 들고가는 건 위협적으로 보이려나... 기왕이면 좀 밝은 복장으로 들어가?”
“아니지. RPG 게임이잖아? 최대한 무장한 상태로 가서 전투력을 과시하는 거야. 신규유저들도 더 쎄보이는 쪽에 붙으려 할거 아냐”
‘음. 듣고보니 맞는말이네”
그렇다고 중무장 갑옷을 입고 가기도 좀 그렇잖아.
강해 보이는 거야 당연히 지금의 천옷보다는 그쪽이 낫겠지만, 이것도 보통 천옷이 아니다.
무려 드래곤들의 가호까지 얹혀진 SSS급 천옷이란 말씀.
외관으로는 철제 갑옷이 세 보일지 몰라도, 만일의 전투를 대비한다면 이게 훨씬 낫다.
“결국 30분동안 고민해서 그냥 원래대로 가는거냐”
“다른 수가 생각 안나는 걸 어떡해”
끝내 평소 입고 다니던 복장 그대로가 제일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런데 나 혼자만 내려가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홍보 안하고?”
“아무래도 지금 이쪽 진영에서 잘 알려진 사람은 너밖에 없다시피 하잖냐. 신생왕국인 아스칼 출신 랭커가 있을리도 없고. 남향왕국 출신 랭커가 몇 있다고는 하는데 요즘은 많이 접속 안한다더라고”
“결국 내가 얼굴마담인거구나”
“그래도 혹시라도 큰 싸움날 거 같으면 바로 연락해. 병사라면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것 참 안심이 되는구나.
잠시후 엘카피에서 나를 시작섬 위로 텔레포트시켜주었다.
중앙광장 분수대.
정말 오랜만이에 보는 풍경이었다.
“그러고보니 그 수련장 아직도 있으려나?”
어느새 처음 게임을 시작했을때부터의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전투법을 익히고 빈약한 스탯을 보완하기 위해 물약 빨고 허수아비 노가다만 하던 시절. 처음으로 태오와 타이탄 보스를 잡았을 때.
중앙왕국에서 설인괴수를 잡은 뒤 남향왕국으로 불려갔던 때.
그 이후로 케인, 승현이와 수아 등등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여행하고 웃던 기억.
그리고 제일 소중한 ‘유희와의 만남’.
“아차! 정신 차려야지. 이러고 있으면 안되잖아”
이러고 있는 순간에도 연합군 녀석들이 신규유저들을 다 데려가고 있을 것이다.
“연합군 쪽으로 넘어오시면 랭커들이 책임지고 버스태워드립니다! 클래스 별로 랭커가 직접 태워주는 고속버스!”
“책임지고 1주일 안에 100레벨까지 올려드립니다!”
높은 곳에 서서 전언 마법으로
분명 삼위연합군에서 가장 유명한 유저는 랭커 겸 스트리머인 케인일텐데, 무슨 이유에선지 여기에선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다른 곳에서도 홍보를 하고 있는건가 싶어 여기저기 둘러봤지만 역시 보이지 않는다.
“아무렴 어때, 나야 좋은거지 뭐”
그럼 시작해볼까.
우선 나는 준비물을 살폈다.
중간 크기의 나무박스와 태양을 가려줄 천막. 그리고 편법으로 사들인 캐쉬템 확성기.
천막을 뒤쪽으로 설치한뒤, 박스를 밟고 올라서서 확성기를 들었다.
“아안녀어엉하아아시이입니이이까아아 여어어러어어부우운!!!”
볼륨을 최대로 키운 뒤 시작섬 전체에 울려퍼지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즉각 나타나는 반응들.
“아 시발 뭐야?!”
“확성기 어그로꾼 새끼들 아직도 숙청 안됐냐? 이미 유행 지났는데 아직도 하는 놈이 있네. 대체 뭐하는 새끼지?”
다들 불만스러운 듯한 말투였지만, 그래도 어그로는 확실히 내게로 쏠렸다.
오죽하면 연합군에게 반쯤 넘어간 사람들까지 이쪽으로 고개를 휙 돌려볼 정도였다.
“모두들 반갑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신규 유저분들을 모셔가기 위해 온 현우라고 합니다!”
현우.
이미 워랜드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리가 없는 그 이름.
내가 이름을 밝히자 순식간에 광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진짜 현우 맞는거야?”
“워랜진에서 보던 영상이랑 비슷하게 생긴 것 같긴한데. 그래도 확실하진 않잖아”
“진짜 랭커 헌우면 프로필 띄워서 인증해봐!”
“그래, 가장 간편하네. 프로필 띄워줘!”
사람들은 랭커를 만났다는 데에 신기함보댜는, 중복닉네임을 이용한 짭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먼저 모였다.
프로필만 보여주면 된다면야 뭐. 까짓거 인증해주면 되지.
[이름 : 현우]
[레벨 : 204] [직업 : 비공개]
[아스칼 개국공신/랭커]
스탯이라던가 그런 세부적인 정보들은 싹 다 제외한채 기본적인 것만 보여주는 프로필카드.
하지만 레벨과 칭호만으로도 내가 랭커 현우라는 걸 인증하기에는 충분했다.
“오오, 미친! 진짜다!”
“랭커 칭호 딱 박혀있는거 보이시죠? 저 진짜 현우 맞습니다”
프로필을 딱 까놓고 나서야 사람들이 날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팬이에요! 사인 한번만 해주세요!”
“난 사인이고 뭐고 필요 없어. 이쪽 한번만 봐주세요!”
“다 비켜! 내가 1빠야”
순식간에 나 혼자뿐이던 주변이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 정도면 거의 시작섬에 있는 모든 유저들이 다 몰려온 것 같은 느낌인데.
문득 저 너머에서 손님을 다 뺏겨 이를 부드득 갈고 있는 연합군 녀석들이 보였다.
그러게 좀 인지도 있는 사람을 데려와서 홍보를 했었어야지.
“남향왕국 오면 책임지고 버스 태워주실건가요!”
“오오! 탑 랭커한테 직접 버스 받을 수 있는거야?”
“랭커는 연합군 쪽이 더 많잖아? 케인한테 버스받을 수 있는곳도 그 쪽인데”
“다 닥쳐! 1위 미만 잡이야. 난 그냥 이쪽으로 갈래!”
“하...하하... 여러분 잠시만 좀 진정을...”
워낙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보니 내가 아무말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이거, 이렇게 되면 내가 말할 기회가 사라지잖어...
“모두들 조오오오요오오오오옹!!!”
“”“히익!!!”””
결국 확성기에 대고 한번 더 소리를 지르자, 다시 분위기가 엄숙한 교회라도 되는 조용해졌다.
그래. 이래야 내가 말을 하지.
“여러가지 궁금증이 있으신 것 같은데 제가 직접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본격적으로 영업이 시작되었다.
“우선 전투 직업 유저분들은 제가 직접 버스태워드립니다. 저쪽에서 1주일 안에 100레벨 찍어준다고요? 전 3일안에 찍어드리겠습니다!”
“우오오오오!”
너무나도 파격적인 조건에 다들 환호성을 질렀다.
내가 이 캐릭터로도 100레벨을 찍는데 몇 달이 걸렸는데 그걸 3일로 압축하겠다니. 정말 해준다고 하면 놀라지 않을수가 있겠나.
“단, 그만큼 열정이 있으신 분만 받습니다. 3일 내내 쉬지 않고 저랑 사냥하실수 있는 끈기와 여유가 있으셔야 합니다. 그 밖에 시간이 많이 없으신분들도 열흘안에 80레벨까진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정말 될지 어쩔지는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정말 확신하는 거는, 내가 버스태워줄 때 밤을 샌다면 3일안에 100레벨이 불가능하진 않다는 것.
“아무리 3대 2의 전쟁이라 해도, 저희에겐 아틀란티스도 있다구요! 심지어 거기서 진영버프도 얻어온 참입니다. 물론, 자세한 내용은 저희쪽에 넘어오셔야 알려드립니다“
대충 이정도 했으면 되려나.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프로필 인증을 했을 때부터 우리쪽을 선택한 눈치였다.
미리 와서 선동질을 하고 있던 연합군에게 단단히 카운터펀치를 날린 것.
그러고 있자니 녀석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어이어이, 갑자기 쳐들어와서 남의 유저들 다 뺏어가는 건 예의가 아닐텐데?”
“적 진영인 주제에 예의고 뭐고 따질 상황이냐? 그냥 너희 인기가 없어진 걸 인정해”
확성기까지 내던지고 이쪽으로 달려온 녀석들에게 일침을 날렸다.
순식간에 주변에 모여있던 사람들까지 그들에게 시선이 쏠렸고, 순식간에 광장은 갑분싸가 되었다.
“어떡할래, 이 분위기”
너 때문에 흥이 다 깨져버렸으니 책임져!
“으으... 진짜 저걸 그냥 확!”
놈이 내게 달려왔고, 가볍게 몸을 틀어 피하자 그대로 너머에 굴러떨어졌다.
우장창!
한 놈은 지 혼자 나가떨어졌고, 이제 시작섬에 온 연합군도 한 명 남은건가.
“방금 전 무례한 행동은 대신 사과할게. 우리가 손님을 뺏긴것도 단지 우리의 인지도가 떨어졌을 뿐이고 말이야”
얘는 그래도 뇌라는 게 있는 애 같군.
“하지만, 저들에게 확실히 알려줄 필요는 있지 않아? 누가 더 강한 쪽인지”
“그린 존에서 PK 전투를 하자는거냐?”
“물론 그럴 순 없지. 시작섬에 있는 콜로세움에서 경기를 하는게 어때. 2대 1로 말야”
나는 남자의 얼굴과 장비를 살폈다.
케프.
200레벨대의 전사 랭커로서, 동생인 제프와 듀오 사냥콤비로 유명하다.
2 대 1이라는 건 아마 동생을 데려오겠다는 뜻이겠지.
“공정한 경기를 해야지, 2대 1은 또 뭐야”
“랭킹 차이가 몇인데 그정도 핸디캡은 있어야지. 게다가 지금 왕국 상황을 봐도 그 정도 해내지 못하면 이길 수 없을걸?”
내가 기억하기론 케프와 제프의 랭킹은 100위 초반대이고, 반면에 나는 탑 10에 들 정도.
거기에 왕국의 전력차이도 있으니 실제론 2 대 1 정도는 이겨내야된다는 뜻이었다.
어떻게하지?
랭킹차이가 있다 해도 직접 전투력에선 내가 밀릴 지도 모르는 일이고, 여기서 거절해버리면 겁 먹은 것으로 생각해 유저들이 발을 돌리게 될 것이다.
빼도박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는 거지.
“설마 쫄은 거냐?”
“너희같은 좆밥들한테 쫄았을리가. 결투신청을 수락한다. 내일 콜로세움에서 누가 강자인지 확실히 보여줄게”
수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겨야 하는 것이다.
* * *
“으아아아아아!”
자괴감에 가득한 절규소리가 여관에 쩌렁쩌렁 울러퍼졌다.
“에휴. 그러게 누가 그렇게 뻔히 보이는 미끼를 덥석 물래?”
“그래도 어쩔 수가 없잖아. 도발까지 당했는데 물러나버리면 약자라고 낙인찍힌다고”
사실은 절대 그렇지 않은데도, 은근 이런 선동질에 쉽게 넘어가는 게 인간이다.
내가 수락했기에 망정이지 아마 거절했으면 거기있던 유저 중 최소 절반은 그냥 연합군에 가버렸을걸.
“힘내라. 다음부턴 교훈을 배우길 빌게. 좀 사리고 다녀”
침대에서 조용히 차를 마시던 테오가 내 어깨를 토닥였다.
“시바아알.... 전략이라도 짜 봐야 될까”
“아니면 차라리 로그아웃하고 컴퓨터로 상대에 대해 알아보는 건 어때? 플레이 영상 같은 건 워랜진보다도 아이튜브에 많이 있을테니까”
“내일 정오까지니까 대충 14시간이면, 현실로는 3시간 조금 넘게 남았네”
짧은 시간이지만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럼 난 먼저 나가서 조사해볼테니까, 내일보자”
“응. 조심해서 들어가라”
그렇게 인사를 하고는 곧장 로그아웃했다.
화면이 닫히고 보이는 것은 아저씨의 빌라 안.
“오늘도 일찍 나왔구나”
“그래도 조사만 하러 잠깐 나온거라서, 금방 다시 돌아올거에요”
“무슨 일 있는거냐? 게임하는데 조사씩이나 다 하고”
지금껏 수년동안, 캡슐방이 되기 전 PC방 때부터 나의 겜창짓을 봐온 아저씨도 내가 게임에 대해 조사하러 가는 건 처음 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승산이 너무 없는 만큼 최선을 다해봐야 했다.
“3시간쯤 있다가 다시 돌아올게요. 그동안 어디 안가실거죠?”
“물론이지. 마침 오늘은 쉬는날이잖냐”
웃어주는 아저씨를 향해 나도 씽긋 웃어주고는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다녀왔습니다!”
“일찍왔네? 무슨 일 있었니?”
“아무것도 아냐, 엄마. 그런데 아마 다시 나가야봐야 될 것 같아”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아무 거리낌없이 말을 놓고 있는 나.
그렇게 대충 둘러대고 방으로 올라가려 했는데, 왠지 오늘은 엄마가 계속 나를 붙잡으려 했다
“요즘 들어 통 얼굴보기 힘드네. 아직 대학 입학한 것도 아닌데 요즘은 뭐하고 지내시나?”
“그, 그게... 요즘 좀 바빠서...”
“왜? 무슨 일로 그렇게 바쁜거야?”
“그게 그러니까...”
왜 이렇게 구체적으로 질문하는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