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기전쟁시대 -->
85화
"준비는 됐나?"
"안됐다고 하면 안 보내주기라도 하시게요?"
"그럼 물론이지. 아깝게 고위 마법들을 낭비할 필요가 없지 않나"
인간 한 명한테 그 많은 버프들을 꼴아박는게 아깝긴 했나보다.
하지만 그 만큼 효과는 굉장했다.
[현우]
[HP : 48,750]
[공격력 : 9,486]
[민첩 : 729 (+80)]
대충 버프를 받은 스탯 목록들.
역시 드래곤 무리에게 받은 버프라는 걸 과시라도 하듯 HP는 5배, 공격력도 거의 3배나 불어나 있었으며, 민첩도 2배 가량 높아져 있었다.
"미리 말하지만, 이 많은 주문들을 처먹어 놓고 저 자를 막지 못한다면 자네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걸세"
"하하. 물론이죠..."
왠지 장로의 보복이 무서워서라도 반드시 막아야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형 혼자 가도 되겠어요?"
"그래 맞아. 상대는 바깥쪽 드래곤을 전부 이기고 온 놈이라고.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
"이렇게 버프 떡칠 돼있는데 뭐가 문제야. 걱정하지 말고. 여기 얌전히 있기나 해"
괜히 두 사람이 어설프게 끼어들었다간 방해가 될지도 모르니.
만만의 준비를 갖춘 뒤, 나는 회관을 나와 드래곤 도시 외곽으로 향했다.
"저기... 오는건가?"
굳이 의문형으로 중얼거린 이유는, 저쪽에서 누군가가 다가온다는 걸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뭔가가 다가오고 있는 것 같긴 하면서도 정확한 형체는 보이지 않고, 빠른 속도로 갈라지는 주변의 바람만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중요한 건 엄청, 엄청나게 빠르다는 것이었다.
"에렌 맞구나"
눈으로 확인하기 힘들 정도라는 것까진 몰랐지만, 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기에 금방 다시 진정할 수 있었다.
만약 지금 그에게 오버레벨을 부여한다면 대충 600레벨 정도는 되지 않을까.
드래곤을 슬라임 마냥 썰고 온 사람이니 절대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남의 집에 처들어 올 땐 함정 정도는 당연히 감수해야지!"
에렌이 가까워지고 있다.
아마 3초 뒤면 바로 내 옆을 지나갈 것이다.
3... 2... 1!
부웅.
"인피니트 그래비티"
미리 위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드래곤들이 이 길가에 대규모 중력장을 설치했다.
대상의 이동속도와 공격속도를 늦추고 군중제어 저항력을 감소시키는 고위 중력마법. 물론 나한텐 안통한다.
달리고 있던 에렌의 속도가 급감했고, 내 앞을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빤히 보였다.
그러더니 곧 흥미를 보였는지, 완전히 멈춰서서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타이탄이 왜 이런곳에? 나는 우리의 동족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같은 편이니 비켜"
"아니 글쎄, 난 타이탄이고 뭐고 모르겠고. 너나 비키지. 남의 집에 함부로 쳐들어오는건 예의가 아니잖아?"
"너도 폴리모프였던 건가... 먼저 수도를 공격한 건 너희들일텐데?"
"그전에 너희 잘나신 황제께서 영역을 침범했지. 그리고 역사가 어찌됐든 상관없어. 난 널 막을거니까"
"검으로 얘기하겠다는 거냐. 나야 환영이지"
에렌은 마검 블러드터스터를, 나는 성검 가디언 엔젤을 뽑아들었다.
아무런 제약이 걸려있지 않은 폭주 상태라 그런지 가엔의 각성모드일 때보다 훨씬 더 날뛰고 있는게 눈으로 보였다.
다행히 어그로는 확실히 끌린 것 같구나.
슈욱.
한 마디 말도 없이 에렌은 내게 달려왔다.
다른 사람이면 발을 떼는것조차 어려울 정도의 중력마법이 작용하고 있음에도 그는 너무 빨랐다.
이제야 겨우 조금씩 승산이 보이기 시작했달까.
팅!
측면으로 바로 치고 들어오는 공격을 검날을 세워 빗겨냈다.
그리고 돌진해온 에렌과 역방향으로 달려가며 그의 뒤로 돌아가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그 정도 속도는 따라간다고!"
"...!!"
찰나의 순간만에 몸을 반대로 틀어 내 공격을 막아낸 에렌은 바로 반격각을 보았다.
저걸 반응하다니.
이동속도와 공격속도에만 영향을 줄 뿐 반응속도까지 둔해지진 않으니까 이해는 간다.
"하압!"
간신히 가엔을 거꾸로 돌려 막는 모션을 취하고, 무릎을 최대한 당겼다가 발차기로 밀어내며 그와 거리를 벌렸다.
그래. 이젠 정신 바짝차리자.
디버프를 먹었어도 그는 빠르다. 보스 레이드처럼 둔한 녀석을 상대하는 게 아냐.
밀려나고있는 그를 향해 곧바로 도약하며 큰 궤적을 그리며 검을 휘둘렀다.
첫번째 공격은 사거리의 간발의 차로 빗나갔고 바로 다음 공격을 준비했으나, 그 순간 녀석이 피식 웃었다.
"젠장!"
오른손에 블러드터스터를 꼭 쥔채로, 왼쪽으론 내게 단검을 던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검을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든 상태라 이 거리에선 방어도 불가능.
단검이 배에 박히기 직전 간신히 그림자도약을 써 뒤로 물러났다.
가엔이 허공을 가르며 쿵 하고 땅에 부딪혔다.
이대로는 안돼.
승부가 너무 나지 않는다.
설령 이러다가 에렌이 그냥 무시하고 중앙 둥지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간 어찌할 도리가 없어.
마검 각성을 하고 싸울까 생각도 해봤지만, HP가 증가했다 하더라도 45초라는 타임리미트는 너무 치명적이다.
거기다가 그동안 HP가 계속 닳으니까 공격을 한번이라도 허용했다간 정말 위험할수도 있고.
"너, 꽤 빠르구나. 뭐하는 녀석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흥미가 좀 생겼어"
"흥미 같은 여유부릴 틈이 없을텐데. 이자리에서 쓰러질 수도 있다구?"
"인정해줬더니 자기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군. 너 따위 정도로는 날 막을 수 없어"
"그럼 당장에라도 날 쓰러트리고 가 봐. 할 수나 있으면"
도발은 이정도로 충분하다.
호흡을 회복한 에렌은 곧장 내게 돌진했고, 나도 맞방향으로 돌진하며 중앙에서 부딪혔다.
팅팅팅팅팅팅!
절대 가벼운 쇳소리가 아니었다. 단지 부딪히는 속도가 너무 빨라 뒷소리가 계속 묻히고 있는 것.
수십번 검이 맞부딪히던 도중, 마검 블러드터스터가 내 볼깃을 살짝 스쳐지나갔다.
이 싸움에서 검으로 입혀진 첫번째 피해.
기분 나쁜 기운이 얼굴을 뒤덮었다.
마검으로 피격당하면 통각이 아니더라도 묘한 감각을 느낀다는데, 이건 꽤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 싸움에서 검으로 입혀진 첫 피해.
기분 나쁜 기운이 얼굴을 뒤덮었다.
마검으로 피격을 당하면 통각이 아닌 묘한 감각이 느껴진다는데, 이건 꽤 심각한 수준이었다.
HP는 8%정도밖에 닳지 않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더 이상 공격을 허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없어야 한다.
"하아!"
이 자리에서 반드시 에렌을 끝내버리겠다는 다짐을 하자, 공격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물론 에렌도 잘 반응해 막고 있었지만 과연 언제까지 버틸수 있나 볼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고 암시라도 하듯 나는 조금씩, 꾸준히 공격속도를 올려갔다.
그리고 아주 잠깐, 그와 나의 공방 패턴이 어긋났을때.
타앙!
"...!!"
나는 보란듯이 그의 검을 튕겨냈고, 벌어진 틈으로 복부에 두 대를 휘두른 다음 유화술로 곧장 뒤를 잡았다.
"잘가"
쓰러지고 있는 에렌의 뒤쪽으로 검을 세워두고는 귀에 속삭였다.
이제 곧 그는 가엔에 궤뚫릴 것이고, 전투는 끝날 것이다.
...그래야 하는데.
"그런 말을 하기엔 아직 100년은 이르지 않아? 너나 잘가라고"
피식 웃는 그의 말소리를 듣자 소름이 끼쳤다.
그리고 잠시후.
검에 궤뚫린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