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널 찾아 헤메고 있어 -->
76화
"나한테 선택할 기회를 주는 거라면, 난 안가. 이게 내 선택이야"
"너 정말. 그 성적을 그렇게 포기할 거야? 그 능력이면 정말 뭘 해도 성공할 텐데"
"내 능력 내가 안쓰겠다는 데 뭔 상관이야? 할수만 있다면 딴 사람한테 줘버리고 싶다고"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누나야 말로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엄마 아빠한테 그런 말을 한 건데? 누나는 안 그럴 거라 믿었던 건데 그렇게 배신을..."
원래 대학 얘기야 그렇게 신경쓰던 것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대화주제는 바뀌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부모님이잖아. 그런 중요한 사실을 양심적으로라도 어떻게 숨길수가 있어"
"친동생이랑 한 약속 어기는 건 별로 양심에 안찔렸나봐"
"솔직히 내가 봐주는 동안 너가 나아지지도 않았잖아. 그게 얼마나 나한테 힘든지 알아?"
그녀가 언성을 높혔다.
"동생이 병에 걸렸고 그걸로 괴로워하는데, 옆에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게 얼마나 힘든지 아냐고"
"계속 이런 식으로 하면, 날 더 힘들게 만들 뿐이야. 그러니까 참견하지말고 꺼지라고 시발"
"...너 말투가 또 험해진다?"
"...!"
순간 아차 싶었다.
대학 다니다가 부모님과 싸움이 난 뒤 강원도에 있던 집으로 돌아갔던 시절.
혼자라는 외로움과 무력감에 빠져있던 내게 누나가 찾아와 위로해주었고, 그때 이후로 절대 누나 앞에선 나쁜말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때 자살시도까지 생각하고 있던 날 막아준 사람한테 지금 도리어 화를 내고 있다니.
누나가 지금 잘못한 건 맞았지만, 내가 이래도 되는걸까?
"하아, 미안해. 요즘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
던전에서 유희를 잃은 뒤로 마음이 차분해질 줄을 몰랐다.
"아냐. 내가 더 미안해. 너가 그 일 때문에 참견받는 거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이랬으니까. 대신에, 내가 묻는 거 한가지만 대답해줘"
"뭔데?"
"요즘 왜 이렇게 신경이 곤두서 있는거야? 단순히 불려왔다는 이유만으로 이러는 걸수도 있지만, 그 밑에 뭔가가 더 있는 것 같아"
피식.
역시 바로 알아채버리네. 심리상담사한테는 어쩔 수 없는 건가
"내가 저번에 말해줬었지, 유희라는 애"
"게임 속에서 만나서 같이 여행한다던 그 애? 걔한테 무슨 일이 생긴거야?"
"위험한 던전에 들어갔었는데, 밤중에 습격을 당했어. 난 무사했지만 유희가 납치를 당했고, 난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저런..."
"그게 단순히 게임이었다는 건 알아. 하지만, 유희와 만나는 것은 현실이 아닌 그곳에서나 가능한 일이야. 자고 있는채로 잡혀갈동안 작별인사도 못했고, 이렇게 그냥 헤어져버릴 순 없어"
언젠가는 놔주게 되더라도 지금 당장은 놓칠때가 아니야.
반드시 찾아내서 다시 한번 만나야 한다.
하지만.
"누나도 알다시피, 이젠 랭커플레이어 현우로 돌아가지 못해"
워낙 서버가 바빠서 그런지, 대부분은 설정한 아바타의 데이터가 캡슐 내에 오프라인으로 저장되어 있다.
서버에 온라인으로 올려놓도록 설정이 가능하다고도 하지만, 그런 건 전혀 모르는 지라 난 건드려보지도 못했다.
간단히 말해서, 집에서 쓰던 캡슐이 버려짐과 동시에 내 캐릭터도 날라갔다는 소리다.
'현우' 이전의 캐릭터가 사라졌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
"...그런 거였구나. 네가 그 게임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가"
"하지만 이젠 뭘 어쩌겠어. 워랜드의 세계에 돌아갈 수 있는 방법도, 돌아간다 하더라도 유희를 찾을 수 있는 방법도 없는데"
그때, 누나가 갑자기 다시 시동을 걸며 악셀을 밟았다.
"어, 어디로 가는거야?"
"일단 따라와봐. 대학 같이 지루한데는 아니니까 조금 기대하라구"
누나가 날 데려간 곳은 한강 다리 옆 기차역 근처에 있는 큰 고층건물이었다.
"여긴...?"
"워랜드의 개발사, NDK게임즈 본사야. 친구가 이쪽 개발자랑 인연이 있는데, 꽤 전부터 너랑 얘기를 해보고 싶다고 해서 말야"
"왜 진작 말 안해줬어"
"안그래도 게임중독인데 썩 내키지가 않아서 말이지. 하지만 오늘은 보내줄게. 자, 빨리 가봐"
개발자를 만난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데스크 들어가서 정찬호라는 사람을 찾아. 네가 물어보는 거라면 거의 다 대답해줄거야"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하지만 저 안에 들어가보고 싶다는 발걸음은 솔직했다.
"뭔가 얻을 수 있길 바랄게. 꼭 그 아이를 찾아"
* * *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정찬호라는 사람을 만나러 왔는데요"
안내원의 표정이 갑자기 썩는다. 무턱대고 GM 불러대는 진상 손님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건가.
"음... 개발자님을요? 미리 용건이 있으신 분만 만나실수 있는데,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현우 라고 합니다"
"잠깐만요. 개발자님께 말씀드려볼게요"
안내원은 잠시 전화기를 들어 누군가와 얘기를 하더니, 이후 놀란 표정으로 내게 위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로 안내해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정찬호라는 사람은 제일 꼭대기 층인 58층에 있다고 했다.
워낙 층이 높다보니 1분 정도는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엘리베이터는 금방 올라갔다.
띵.
문이 열리고, 넓고 확 트여있는 공간이 나타났다.
워낙 깨끗한 앞면의 창문때문에 양옆면의 벽이 아니었다면 뚫린공간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언제쯤 올까 기다리고 있었지. 슬슬 올때가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말이야"
"...당신이 정찬호 인가요?"
"그럼 우리 둘 밖에 없는다 나말고 누가 정찬호일까. 말장난은 이쯤 하고, 잠깐 가까이 와볼래?"
"네?"
"일종의 짭을 구별하기 위한 테스트야. 저 의자에 앉아봐"
그가 가리킨 의자는 평범한 가죽의자였고, 그 위에 전선과 각종 용도 모를 장치들이 가득 달려있었다.
일종의 초기형 캡슐 같은 건가.
내가 말없이 자리에 앉자, 렌즈 같은 것들이 내 눈을 스캔했다.
"앗 따거!"
"초기형 모델이라 약간 부작용이 있을수도 있지. 어쨌든, 짭은 아니구나"
정찬호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워랜드 개발자라니, 어떤 부분을 만드신 거에요? 그나저나 다른 개발자들은 어딨고 당신만..."
"풉, 푸하하하!"
그가 갑자기 방 가득 울려퍼지게 웃었고, 나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 했다.
"코딩부라던가, 시나리오 작가라던가. 일개 평범한 부서의 개발원이 이런 작업실을 가질 수 있을리가 없잖아"
"에에? 그럼 당신은..."
"기획총괄... 쯤 되려나. 시나리오는 전부 내가 짰고, 시스템을 관리하는 인공지능 프로그램도 내가 설계했지. 코딩은 할수 없이 새내기들한테 맡겼지만 말이야"
"...?! 그럼 당신이... NDK의 그 전설의 개발자?"
"뭐야, 데스크에서 꼭대기층까지 올라와놓고 몰랐던 거야?"
그거야 누나지인이라고 들었으니 당연하지!
========== 작품 후기 ==========
길고 긴(?) 여행이 끝났습니다! 휴재도 끄읕. 이젠 다시 9시 정상연재해용. 선추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