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 내가 랭커라고? -->
68화
[중급 수련장의 허수아비를 처치하셨습니다]
[중급 수련장을 클리어 하셨습니다!]
흉측하게 생긴 허수아비를 박살내자, 어두웠던 공간 앞에 문 한짝이 나타났다.
지하실로 이어지는 포탈 같지는 않은데. 바로 밖으로 나가는 건가?
"클리어하고 나서 얼굴 한 번쯤은 보고 싶었는데, 살짝 아깝네"
처음 들어왔을땐 빨리 헤어지고 싶단 생각 뿐이었는데, 몇 주 동안 같이 있다 보니 정이라도 들었나보다.
그래도 더 지체할 시간은 없겠지.
이곳을 나가면 제일 먼저 유희랑 묵었던 여관에 찾아가볼 생각이었다.
벌써 시간이 꽤 흘렀지만 애초에 한 달 정도 넉넉하게 쉴 생각으로 잡은 여관이었으니, 아직은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셨어요? 한참 기다렸잖아요!"
"여기서 내내 기다리고 있었어?!"
수련장을 나가자마자 바로 앞에 나와 있는 유희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오래 계셔서 걱정하긴 했는데, 중급 수련장이 일찍 끝날리가 없잖아요. 며칠 정도야 뭐 그냥 기다렸죠"
"와..."
정말 어지간히 할 게 없었나보구나.
그나저니 며칠 정도 기다렸다니? 최소 2주일 넘게 안에 있었는데?
"혹시, 나 몇일동안 기다린 거니?"
"음... 한 5일 정도요?"
두둥.
"...최소 4배는 빨리 흘러갔단 거잖아"
가상현실 게임중에는 뇌가 특수한 수면상태가 되어 시간을 빠르게 할 수 있다느니 뭐니 하는 소리는 들어본 적 있다.
그걸 이용해서 중급 수련장의 플레이 속도를 올려놓았던 건가.
"잠깐. 그럼 나, 5일만에 대장장이 스킬 고급 찍었다는 거야?"
아무리 수면시간이 적고 하루 10시간이 넘게 노가다만 했다 하더라도 2주만에 고급 1레벨이면 굉장히 빠른 편이다.
그런데 시간이 빨리가서 그마저도 5일로 줄었다니.
[해당 스킬을 습득하지 않으셨습니다]
불행히도 중급 수련장을 끝마치자 대장장이 스킬은 다시 삭제된 듯 했다.
역시 너무 꽁으로 준다 했어.
그래도 한번 제대로 노가다를 경험해봤으니, 다음번에 대장장이 스킬을 배우게 되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쉽게 숙련도를 올릴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우 님, 그 검은 뭐에요? 처음 보는 건데"
"아, 이거 말이지..."
대장간에서 완성한 검이니, 유희는 가엔을 처음 봤겠구나.
검을 뽑아서 그녀에게 보여주려던 그 순간.
"오오, 드디어 나왔어!"
"미친 진짜였어? 진짜 중급 수련장까지 들어간 노가다 장인이 있단 말야?"
"역시 대한민국, 자랑스럽다"
이 사람들은 다 뭐지?
처음 이 수련장에 들어갈때 앞에 모여있던 사람들보다 10배는 더 많은 사람들이 지금 몰려있었다.
그것도 전부 나를 쳐다보며.
"저기 실례합니다만, 한국 서버 랭커이신 현우 님 맞나요?"
"네? 현우는 맞는데 랭커라뇨..?"
"오오 미친! 진짜 맞대!"
"우오오오!"
아니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건데?
"유희야... 혹시 알고 있으면 설명 좀 해주겠니?"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전 그냥 기다리기만 해서... 아! 그러고 보니, 저번에 랭킹 순위가 어떻게 됐다던데"
"랭킹이야 실시간으로 바뀌는 거잖아. 그랬으면 벌써 내 상태창에 랭커라고 떴겠ㅈ...!"
[이름 : 현우]
[Lv. 108]
[처형인/아스칼 개국공신/랭커]
...
랭커? 래애애앵커어어?!
[워랜드 세계에서 천 명 안에 드는 유명인들에게만 주어지는 칭호. 친밀도가 0 이상인 지역에선 모든 기본서비스를 무료로 이용 가능]
[나의 현재 순위 : 24위]
"내가... 워랜드 24위라고...?"
전투직업만 있는 게임이 아닌 만큼, 워랜드의 랭킹은 전투력이 아닌 '명성'수치로 순위가 매겨진다.
어그로 많이 끌고 사방팔방 활개치고 다니면 오르는 수치라곤 하지만, 그래도 내가 그만큼 유명하단 거잖아?
워랜드 한국서버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30명을 찝으라고 한다면, 그 안에 내가 나온다는 소리였다.
"사인 좀 해주세요!"
"스샷 찍어도 되죠?"
"야 빨리 스트리밍해! 지금 여기 뉴 랭커 떴다고!"
아무래도 나 땜에 많이 소란스러워진 모양이네.
"저... 로그아웃해서 좀 쉬다 오실래요? 아무래도 지금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으니까 불편하실텐데"
"에휴 그래야겠다. 수면모드로 로그아웃 할테니까 너가 여관까지 좀 데려다줘"
"에에, 여자한테 지금 몸 떠맡기시는 거에요?"
"그런 거 아니거든?!"
로그아웃도 내 맘대로 못하게 해 얘는!
* * *
"흐아, 피곤해"
잠에서 깨어난 직후에도 여전히 졸린것과 비슷한 현상이려나.
그나저나 방금전까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 나 밖에 없는 집에 혼자 있으니 기분이 살짝 이상하다.
그런데...
"아구 우리 귀여운 동생! 이제야 나왔어?"
이 누나는 여기서 또 뭘 하고 있는건데?
"으, 아무리 친누나고 내 이름으로 되어 있는 집도 아니라지만, 이렇게 남의 집에 말도 안하고 막 들어와도 되는 거야?"
"어머어머 얘가 왜이래. 전화를 안받은 건 너라구? 난 그저 걱정돼서 들러본 것 뿐이야"
정말 휴대폰을 열어보니, 부재중 통화에 누나(10)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래도 이젠 무려 병원에 전문상담실까지 있으면서, 직장 내팽겨치고 강원도까지 와도 되는거야?"
"이 누나에겐 VVVIP환자인 우리 동생님이 제일 중요하다구"
피식.
"내가 애도 아니고..."
"하루종일 밖에 나가지도 않고 게임만 하는 거 보면 딱 초딩인데 뭐. 그나저나 이제 좀 치우고 살아라"
어디에 가든 삶의 발자취를 남기고 다니는 나와 달리, 우리 누나는 결벽증이 의심될 정도로 깔끔하게 사는 걸 좋아했다.
지금까지 같이 산 적이 없었다보니 그걸로 싸움이 일어날 일은 없었지만.
"왜. 지금 이렇게 깨끗한데"
"호오, 그래? 자신 있다 이거지? 지금 당장 이 서랍만 열면..."
"아 알았어! 미안해. 안 그럴테니까 제발 이 환각의 결계를 치우지 마"
내 집은 현재 서랍이나 쓰레기 통 등 안보이는 곳에 쓰레기를 가득 쑤셔박고 가려놓은 상태.
설령 이 위장 중에 하나라도 그녀가 목격했다간, 내가 게임중독으로 격리조치 되기 전에 누나가 먼저 실려갈 것이다.
"그런데 웬 일로 집을 치우라고 한 거야? 지금까진 아무리 더러워도 간섭 않더니"
"사실... 아냐, 아무것도"
뚝.
잠시동안 집 안에 정적이 흘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누나가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가끔씩 사람들은 그저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 쓸데없는 말을 꺼내곤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방금 전 그 표정은?
뭔가 심각한 걸 알고 있는 듯한 표정, 나한테 애써 감추려 하는 표정.
"...솔직히 말해. 뭘 알고 있는거야?"
"역시 안 먹히는 구나"
"심리상담사는 내가 더 잘할수도 있을 걸? 숨기지 말고 빨리 말해봐"
"확실한 건 아닌데... 부모님이 조만간 널 집으로 데려오시려는 것 같아"
"그게 뭐 어때서? 하루 시간 빼서 그냥 갔다오면 되지. 내가 고작 그 정도 게임을 못 참을 것 같아?"
"하아,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라고"
"...?!"
설마, 아니겠지?
아닐거야. 제발. 아니어야 해.
하지만 늘 그렇듯, 신은 내 편이 아니다.
"아무래도 곧 이 집은 팔고, 짐만 챙겨서 널 아예 우리가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시키려는 것 같으셔"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