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급수련장의 상태가...? -->
67화
"못하겠어, 못하겠다고요!!"
"진정하라고"
"시발 이걸 어떻게 깨라는 건데... 존나 진짜같잖아"
몰입감도 문제였지만, 그것을 제쳐놓고도 문제가 너무 많았다.
내가 전에 나왔던 기억을 파악하고 침착을 유지하려 하면, 환영은 그것보다 더한 기억을 계속 보여주었다.
조금이라도 이성이 흐뜨러지면 그 순간을 노려 녀석은 바로 공격해왔고, 같은 수법에 계속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대체 왜 집중이 안되는 걸까요?"
"억지로 이성을 찾으려고 하니까 그렇지. 전혀 안 맞는 공략법을 쓰려고 하잖아"
"억지로 이성을 찾는다뇨?"
"넌 지금 환영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고 있어. 당장 앞에 있는 벽에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그 너머에 있는 것만 좇고 있다는 소리지"
"그 말은, 그 녀석을 잡으려 하기 전에 환영을 처리해야 된다는 뜻?"
"네가 거기서 무슨 안 좋은 기억을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들에 대해 완전히 털고 정리하지 않으면 녀석을 잡진 못할거다"
"하아... 고작 게임에서 클리어 한번 하겠다고 현실에서의 안 좋은 기억을 정리하라니"
그것도 인생에서 가장 악몽 같았던 기억을.
지금 나는 그 기억에 대한 내 감정조차도 불분명한 상태다.
날 이 시골촌에 오게 만든 누나를 증오해야 할 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게임중독인 날 도우려고 하는 현재의 모습을 보면 마냥 그럴 수도 없다.
어쩌면, 심리상담사가 되었던 것은 단순히 나 때문만이 아니라, 누나 안에도 그때의 앙금이 남았던 것이 아닐까?
"으아 시발, 역시 아무것도 모르겠단 말야"
그 좆같은 유모년을 제외하면 누군가 증오할 대상이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그 기억이 악몽으로 남았던 이유가 뭐였을까?
"일단 계속 부딪혀보기라도 하자"
이 돌대가리로 몇시간이고 진지 근엄하게 고찰해봤자 아무것도 안 나온다.
적어도 그 기억을 환상으로 계속 겪는 게 차라리 해답을 얻을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환상에 면역이 생겨 그냥 통과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벌써 생각이 정리된 거냐?"
"물론 아니죠"
"...?"
나는 어제 제작한 검(줄여서 가엔이라고 부르기로 했다)을 챙겨 지하실로 내려갔다.
열 번도 넘게 맞닥뜨렸던 이 포탈.
제발 이번엔 통과할 수 있기를.
* * *
강원도 양양시에 있던 작은 단독주택.
내가 집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유일한 공간.
"이때는 많이 낡았었구나"
내가 좀 자라고 나서 부탁을 드리고 나서야 지금처럼 깔끔한 집이 됐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우리 유모에게 걷어차이고 있다.
"작작 좀 울라고 울보 새끼야!"
유아 시절에 배고 파서 울면 유모는 젖병 대신에 쌍욕을 먹여줬었다.
조금 더 컸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애새끼가 똑바로 하는 일이 없어! 재활용 쓰레기 하나를 못버리냐?! 쓸모 없는 놈"
한글이나 제대로 가르쳐주고 저런 말을 했으면 얼마나 좋아.
참고로 말하자면 난 유치원도 안다녀서, 초등학교 저학년때 담임한테 매 맞으며 배울때 까진 까막눈이나 다름없었다.
오죽하면 제일 먼저 배운 한글이 '비닐류'나 '플라스틱류' 같은 재활용 쓰레기통에 쓰여있는 문구였을까.
"암세포 같은 새끼"
어릴 때 의미도 모르고 자주 듣던 말.
지금은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내가 진짜 저 년을...!
하지만, 그래도 이때는 그나마 괜찮았다.
저래 보여도 날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내버려 두던 사람은 아니었고, 내 자유에 간섭하지도 않았으니까.
입이 살짝 험할 뿐 실제론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했었다.
초등학교 졸업식이 끝난 뒤에야 진심을 알아차렸다.
"드디어 이 걸레짝이랑 헤어지는 구나! 전지민 그 호구 새끼, 내가 돈 전부 먹튀한 것도 모르고 짭짤하게 챙겨줬다니까? 킥킥"
쿵.
친구와 통화하던 그 말이 비수처럼 아직도 내 심장에 꽂혀있다.
수도세/전기세, 식비 같은 안 쓰면 들키는 것들만 제외하고, 그 외에 어머니가 날 키우라고 주셨던 양육비를 유모가 전부 먹튀한 것이다.
그래놓고 11년만에 마침내 자유를 찾았다는 듯 기분좋게 집을 나가버렸다.
그날, 아무도 없는 집에서 나는 하루 종일 펑펑 울었다.
왜 울었을까.
울면 안됐다는 게 아니라, 저 상황에 내가 울 수많은 이유 중에 어떤 이유로 울었을지가 궁금하다.
그때, 갑자기 그 이후의 기억이 잠깐동안 나타났다.
두세달 정도 뒤.
중학교에 입학해서 혼자 이냥저냥 있을 무렵 내게 나타났던 '그 녀석들'.
"야, 같이 피시방 갈래?"
친구도 없고, 세상에 대해 아는 것도 없던 시절 내게 많은 것을 알려준 첫번째 친구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녀석들.
잘 지내고 있냐 새끼들아.
이제야 알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지금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쓸모 없는 생각들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 일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아직까지 담아두고 있어. 벌써 20년도 더 된 일인데.
유모새끼야 지금쯤 돈 다써서 어디서 창녀짓하고 있든 내 알바 아니고, 누나가 나쁜 사람인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내겐 친구도 있다.
굳이 그때 그 녀석들이 아니더라도 지금, 이 곳에도 많이 있다고.
앙금 따윈 이제 없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아직 잃지 않은 지금이다.
"너무 당연한 걸 나불거렸나. 슬슬 나오지?"
생각이 정리되자 이게 수련이었다는 것 쯤은 기억해낼 수 있었다.
샤악.
이젠 회상이 아닌 진짜였고, 가엔을 뽑아 환영의 막을 잘라버렸다.
그리고 그 너머에 당황한듯 얼어있는 허수아비 녀석 한명.
"진짜 못생겼다, 너"
손바닥은 뼈마디만 있는 듯 가늘고 희한하게 늘여져 있고, 엉성하게 엮인 지푸라기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키에에에엑!"
"닥쳐! 시끄러우니까"
마법이 통하지 않은 걸 눈치챈 녀석은 양손으로 낫을 꺼내들었지만, 나는 재빠른 일격 한 방에 낫을 멀리 날려버렸다.
"괜히 남의 기억 들추고 다니지 말고 허수아비면 곱게 쳐맞자!"
녀석에게 진동타격을 발동시켜 보았다.
꽤 빠르다. 하지만 전처럼 맞추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거기다가 민첩도 이젠 300이라고.
타앙.
50타를 맞추는 건 순식간이었고, 강화된 진동타격 패시브 덕분에 허수아비는 바로 작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