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섯번째 왕국 -->
57화
2차 병력도 별거 없었다.
레벨대나 숫자도 1차 군대랑 비슷했고 그냥 무난하게 기절시켜서 막았다.
"자, 셋에 던진다. 하나, 둘, 셋!"
슈욱.
쓰러진 플레이어들이 워프 포탈 안으로 던져졌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도착지점은 아스칼 지하감옥.
유저들이 깨어나면 그곳에서 전향의사를 묻고, 우리 편으로 넘어오길 희망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일 것이다.
거절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그 자리에서 바로 PK.
전쟁 중에는 상대 진영을 향해 살인자 표식이 남지 않으니 그냥 내가 직접 죽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저, 전향할 수 있다고요? 할게요! 무조건 할게요!"
"...?"
뭔가 최소한의 저항이라도 할 줄 알고 반박까지 다 준비해놨는데, 이렇게 순순히 나오니 뭔가 허무하다.
이상한 점은 얘 말고도 대부분의 유저들이 이런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었다.
"혹시 그쪽에서 뭔 일 있었냐? 왜 이렇게 좋아해?"
"절대 라이칸에 가시면 안되요. 안그래도 전투광들이었는데 막상 전쟁나니까 완전 지옥이라니까요?"
"분위기 때문에 숨도 못 쉬겠어요. 제발 저희 좀 살려주세요!"
"차라리 군대 다시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 그 정도로 심한 거였냐.
이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지금 라이칸이라는 곳이 얼마나 숨 막히는 곳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우리 입장에선 다행이지.
덕분에 잡아온 2,000 명의 유저들 중 거의 1,800명 정도가 아스칼 쪽으로의 전향을 받아들였다.
"허, 헛소리 하지마라. 차라리 날 죽ㅇ... 크헉!"
"그래? 그럼 그냥 죽어"
물론 끝까지 저항한 200명은 내가 직접 끝냈고.
* * *
그렇게 대략 2주가 다 되어 갈때 즈음, 상황은 정말 눈에 띄게 좋아져 있었다.
하루에 공격을 오는 플레이어들은 대략 4천명 정도.
물론 한방이면 훅 보내는 아스칼의 진압봉... 아, 아니 마비 검 덕분에 항상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중 전향을 선택하는 플레이어가 거의 3천 정도 되었으니, 원래 있던 전력을 제외하고도 4만명이 넘는 추가 전력이 생겨난 것이다.
분명 라이칸 측에서는 지속적으로 찔러 우리를 지치게 만들 셈이었던 것 같지만, 상대할 힘이 충분한 지금은 오히려 그들의 군대를 깎아먹을 뿐이었다.
녀석들도 그걸 눈치챈 건지, 요 며칠 째 군대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다.
"흐으, 돌고 돌아 또 이 상황인거냐..."
여러 차례의 방어전을 통해 라이칸에서 참호의 위치를 눈치채서, 결국 참호를 버리고 옆쪽의 성벽 위에서 감시임무를 반복중이다.
첫번째 날 무너져버린 옛 성벽의 낭떠러지를 바로 옆에 두고 서 있다고 해서 딱히 무섭다거나 하진 않았다.
그냥 지루하다.
고소공포증 그딴 거 다 씹어먹을 정도로.
"이래서야 전쟁이 끝나긴 하는 걸까. 왠지 점점 시간만 끌고 있는 것 같단 말야"
그렇게 졸린 눈으로 하품을 하며 쌍안경으로 너머를 관찰하고 있던 그때.
"대장! 저 방향에서 뭔가가 보입니다!"
"뭐?! 어느쪽이야?!"
며칠동안 새똥받이 신세나 해와서 그런지, 벌판에서 무언가가 보인다는 소식에 긴장하기는 커녕 오히려 반갑기까지 했다.
확실히 엔초가 가리킨 방향으로 쌍안경을 가져가보니 무언가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애개, 겨우 한 명? 무슨 속셈이지"
"혹시 외교관 같은 게 아닐까요? 아무래도 저쪽은 손실이 클 테니 평화협정 같은 걸 제시한다던가"
"이미 전쟁이벤트까지 나왔는데 그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잖아. 분명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 잠깐!"
쌍안경 배율을 최대로 하여 그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검은 천으로 만든 후드티 같은 옷을 걸친, 뽀얗고 하얀 피부의 앳된 얼굴이지만 전혀 착해보이진 않는 소년.
"케인...!"
* * *
녀석이 라이칸 진영으로서 이 전쟁에 합류했을 거라는 건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하이랭커들은 길드 차원의 문제 때문에 이벤트에 간섭 않겠다고 선언한 상태.
하지만 녀석같은 솔로 플레이어가 그딴 걸 지킬리가 없지.
"그래... 저 녀석이라면 혼자 왔다고 해도 이해가 돼"
랭커는 흡사 신의 능력을 발휘한다는 말이 있다.
어떻게 보면 맞는 소리다.
이 워랜드, 게임은 단순한 숫자의 반복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곳.
숫자의 크고 작음이 강자와 약자를 판가름하고, 단순한 숫자의 크기로 불가능한 격차가 벌어진다.
"확실히 케인이라면 저 정도의 배짱을 뽐낼 수 있겠죠. 군대를 동원해서 잡을까요?"
"아니, 일단 기다려"
'하이랭커'의 칭호를 단 이상 게임 세계에서 상상을 초월한 힘을 발휘한다.
아스칼의 군대를 총동원한다하면 간신히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면 우리가 잃는 게 너무 커.
차라리 저 녀석이 확실한 선제공격을 취할때까지 견제만 하는게...!
"전원 돌격!"
"미친. 저 바보새끼들이!"
대체 어떤 놈의 명령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어림잡아도 만 명은 되는 군대가 성벽을 나와 케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위험해. NPC 전사들도 꽤나 보인다. 저 상태로 두었다간...
"빼! 빼라고 멍청이들아!"
못 들은 걸까 못 들은 척 하는걸까.
높은 성벽 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쌍안경을 들고 계속 녀석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것 뿐이었다.
눈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케인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군대를 보곤 분명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자신의 미끼를 물었구나 하는 회심의 미소를 말이다.
"시발 대체 왜... 남의 경고는 귓등으로도 안 듣는건데"
케인이 병사들을 향해 빠르게 달려들은 뒤, 순식간에 다시 반대쪽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녀석이 지나간 자리에는 거대한 충격파와 굉음만이 남았다.
"젠장! 말도 안돼. 아무리 하이랭커라고 해도 저딴 사기성은..."
일격, 아니 돌진 한 번에 1만대군은 그대로 전멸.
그러고는 무슨 일 있었냐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케인은 계속 아스칼을 향해 걸어왔다.
뛰지도 않고, 뛰려는 기색조차 않고 그저 여유롭게 걸을 뿐이다.
"괜히 여유부리지 말라고. 재수 없으니까"
"어, 어디가는 겁니까 대장?! 설마 저 밑을 내려가실건..."
"그만둬요 현우 님! 현우 님까지 죽으시면 아스칼은 누가 지키죠?"
문득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킨다라. 맨 앞에서 허구한 날 감시만 할 뿐인 내가 아스칼을 지키는 건가?
그러고보니 첫 공격을, 일격에 아스칼을 패배시킬 뻔 했던 전투를 승리했던 건 나였지.
아니 정확히 말하면 테오와 포도당 일행이 끝낸거다. 내가 아니라.
그래. 승리를 위한 서포트. 내가 할 일은 그거면 족해.
"지금 지키러 가고 있잖아요"
정확한 대답. 당연하고 논리적인 대답이지만, 절대 인정하거나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대답.
그런 대답으로 유희 씨의 입을 막은 뒤, 나는 성벽을 내려와 케인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이 결투로 아스칼이 나를 잃는다면, 라이칸은 가장 강력한 전술병기인 녀석을 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