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섯번째 왕국 -->
54화
"여긴 뭐하자고 왔냐"
"이벤트 메세지를 너희만 들은 줄 아냐? 이미 워랜드 전체에 다 퍼졌고, 다들 하나둘씩 미개척지 쪽으로 모여들고 있다고"
"그걸 물은 게 아니잖아. 무슨 생각으로 아스칼에 온 거냐고. 지금 당장만 봐도 라이칸 쪽이 훨씬 우세한데"
나는 여전히 바위 위에 쓰러져있는 채로 중얼거렸고, 뭘 그딴걸 다 물어보냐는 듯 테오는 크게 웃었다.
"라이칸 같이 꽉 막힌 곳이 미개척지를 전부 점령하면 숨도 못 쉴 걸? 승산이 좀 없어도 다섯 번째 왕국은 아스칼이 되는 게 나아"
"그러다가 지기라도 하면 너 그대로 끝장이다"
"그건 저 사람들한테나 말하지 그래?"
테오가 도시 안쪽에 서 있던 군대들을 가리켰다.
뭔가 반쯤 전멸했다시피 했던 것 치곤 많이 좋아진 것 같은데... 잠깐, 저 사람들 아스칼의 군대가 아니잖아?
"...포도당?"
"어때, 저정도면 이제 좀 할만하지 않겠어?"
저 자식들 진짜 이쪽으로 왔구나.
워낙 승패가 확정지어졌다시피한 전쟁이니만큼 라이칸을 선택했어도 이해했겠지만, 솔직히 아스칼에 오지 않았다면 조금은 섭섭했을 것이다.
"자, 모두 돌격!"
남은 적들을 전부 소탕하러 녀석들이 나서주었다.
* * *
확실히 느낀 것은, 포도당이 내가 느끼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는 점이었다.
역시 남향왕국 정예병사들과 같이 훈련받은 전사들.
원래 직업이야 도적이었겠지만, 지금은 최전선에 뛰어들어 싸워도 전혀 부족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기껏해야 50 명 내외밖에 안 되는 남은 적군을 처리하는 데에는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대장! 무사하십니까?!"
"어 그래. 괜찮긴 하다만... 으윽!"
일어나서 녀석들 앞에 바로 서려 했지만, 여전히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긴장이 완전히 풀리는 바람에 안그래도 지쳤던 근육이 완전히 풀려버린 것이다.
일어나기는 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조차 지금은 힘든 일이었다.
"무, 무리하지 마십쇼 대장! 빠, 빨리 힐러를...!"
"그런 게 아냐"
체력/기력의 문제다.
HP/MP 처럼 숫자로 표현되는 능력치가 아닌 지라 회복 포션이나 고위급 사제가 아닌 이상 '힐'이 불가능한 것이다.
"현우 님!"
"유희 씨..."
어느샌가 그녀도 내 앞에 나와있었다.
"에너지 힐(Energy Heal)!"
"...?"
놀랍게도, 그녀가 기적 주문을 외우자 내 기력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게이지가 차는 것을 보았다기보다는 힘을 되찾고 몸이 다시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걸 느꼈달까.
하지만, 사제도 아니고 그저 힐 주문만 몇 개 배웠을 뿐인 그녀가 어떻게?
"에너지 힐이라니, 그런 스킬도 배우셨어요?"
바닥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며 물었지만, 그녀도 구체적인 정황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냥... 얼마전에 스킬 습득 메세지가 나타났어요. 기력과 체력을 회복시켜준다는 데, 그런 스탯이 있는 줄은 몰라서 그냥 두고 있었거든요..."
"스탯이 아니에요"
"네?"
"상태에 따라 신체조정에 영향을 주고 지구력 스탯으로 강화도 가능한 변수의 일종이긴 하지만, 직접 간섭이 가능한 스탯은 아닙니다"
"아아... 뭔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고 안될 것 같기도 하네요. 어쨌든,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그녀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 * *
그렇게 일단 첫번째 군대는 겨우겨우 전멸시켰으니, 당분간은 섣불리 공격을 해오지 않을 것이다.
"모험가분들 되십니까?"
"네, 그런데요?"
"아스칼 도시의 보안부장입니다. 시장님께서 모험가분들을 찾으십니다. 특히 현우 님, 당신을"
"저를요?"
아마도 저번 전투의 일 때문이 부르는 것이려나.
일단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나는 가보기로 했다.
앞으로 전쟁이 끝날때까지 계속 함께해야하는 도시고, 만에하나라도 이길 경우 수뇌부와 최대한 인맥이 있는 편이 좋으니까.
도시 중앙에 있는 시청은 꽤 넓었다.
로드란의 왕성에 비하면 훨씬 초라하지만, 그래도 그 안에 있었던 왕궁 건물 만큼은 되는 듯 했다.
"당신이 현우 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이번 전투에 큰 기여를 했다더군요. 소문은 자자히 들었습니다. 일단 앉으시죠"
저 사람이 시장인가보군.
나는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 그를 마주보았다.
10대 후반/20대 초반쯤으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렸고, 발끝자락까지 닿을 듯한 흰 천옷을 입고 있었다.
위험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아스칼은 평화를 우선시하는 도시이지만, 이번 전투는 저들의 선전포고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저로선 두 도시가 함께 공존하면 좋겠지만, 라이칸의 성격을 보아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란 것 쯤은 예상하고 있었죠"
"저들과 전쟁을 하실겁니까?"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저들이 이기든 우리가 이기든, 한 번 시작했으면 끝을 보고야 말겁니다"
그래도 시장은 저들과 싸울 의지가 있어보였다.
다행이네.
만약 그가 아직까지도 평화 따위를 주장하며 전쟁을 회피하려 했다면 난 이 자리에서 이미 포기했을 것이다.
지금은 싸워야 될 때라는 걸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후... 그래도 현재는 전력차이가 너무 커요. 첫 공격이야 간신히 막아내었지만, 어느 정도 회복이 될 때까진 방어에 치중해야 할 겁니다"
"동의합니다"
최대한 버텨서 적들의 전력을 최대한 줄여놓겠다는 건가.
나도 당분간은 저들을 향해 선제공격을 할 생각따윈 없었으므로, 순순히 앉아 시장이 하는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괜찮으시다면, 앞으로 전투하실 땐 이 검을 사용하시는 게 어떠실련지요"
"이건...?"
언뜻 보기엔 그냥 평범한 롱소드로 보였지만, 상급 마법이 걸려있었다.
"무슨 주문이죠?"
"적을 향해 벨 경우 공격을 흡수하고 대신에 오랜 시간동안 기절시킵니다"
"생명은 소중하다 죽이진 말고 제압해서 가두자, 뭐 이런 건가요?"
"그럴리가 있나요. 전력이 모자라니 전향할 의사가 있는 적들은 받아들야 전력을 보강하겠다는 차원에서 만든 것 뿐입니다. 거절한다면 즉시 처형이죠"
와, 생각보다 쎈데?
솔직히 조금 걱정했는데, 전쟁이 터지니평화의 도시 아스칼의 시장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쎄게 나간다.
이런 곳이라면 해볼만 하겠어.
"좋아요, 이걸 쓰도록하죠"
어차피 공격력 같은 건 상관도 없었으니 나는 시장이 건넨 롱소드를 집어들었다.
가볍다.
"앞으로 꽤 흥미진진한 전쟁이 벌어질 것 같군요. 끝날때까지 잘해봅시다 시장님. 저들을 죽이든, 우리가 죽든 간에"
"동감입니다. 잘부탁드립니다 현우님"
그래, 이 정도면...
내 워랜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전쟁이라 해도 후회 따윈 없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