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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대장, 어떻게 할까요?"
"음... 지금은 PK가 아니라 예전처럼 막 대하기도 힘든데..."
그새 살인자 표식을 제거하다니, 꽤 고생했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렇게 팔이 묶인 채로 가만히 앉아 저 놈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그래, 당연히 유화술로 줄을 풀어볼 생각도 했지.
하지만 그럴때마다 날 묶고 있는 밧줄도 같이 따라왔고, 이상한 짓 했다고 경호원들한테 얻어맞는 건 덤이었다.
"자. 너희도 알겠지만 나도 다시 유혈사태를 발생시키고 싶지는 않아. 그러니까, 우리가 묻는거에만 대답해주면 좋겠어"
우리가 갇혀 있는 곳은 카지노 지하의 방.
우리가 찾아 헤메던 그곳이었다.
"일단 첫째로, 너희들이 아까 그곳에서 무엇을 물어보려 했는지, 여기에 온 목적은 무엇인지, 뒤에 배후가 누구인지 등등을 말해봐"
"한가지가 아니잖아. 여러개를 그렇게 한번에 말해버리면 사고회로가 꼬여서 대답을 못한다구"
저 벨라라는 상인 녀석은 눈치 있는 놈이니, 방금 전 내 대답이 너한테 해줄 말은 없으니까 엿 먹으라는 뜻이란 걸 알고 있을 것이다.
"하아... 빡치게 하네"
찰싹!
벨라가 손바닥으로 내 뺨따구를 세게 갈겼다.
"이봐요!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현우 님, 괜찮으세요?"
유희 씨는 잔뜩 걱정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지만, 오히려 나는 피식 웃으며 벨라에게 되받아쳤다.
"그래, 어디 더 때려봐. 때리고 한 번 다시 PK 가보자. 다음에 너 죽이고 템 다 빨아가게"
녀석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이쯤되면 논리회로가 작동할테니, 여기서 날 죽이면 더 위험해진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살인자 표식은 PK를 반복할때마다 중첩되지만, 표식이 해제된 뒤 다시 PK를 하게 되면 더 빨리 중첩된다.
PK를 처치한 플레이어의 표식 '제압자'가 처형인, 퇴마사(退魔師)로 발전하는 것처럼 살인자 표식도 중첩도에 따라 강화가 가능하다.
살인자에서 연쇄살인자, 대역죄인 등으로 올라가는데 최종 표식인 '속죄하지 못한 자'를 받을 경우 아예 시스템상의 거래가 완전히 정지되는 패널티까지 생긴다.
녀석이라고 거기까지 바라지는 않겠지.
"그래 맞아. 살인자 표식을 남기진 않을 거야. 대신에, 다른 방법이 있지"
"...?"
뭔가 불길한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유저들끼리 PK표식 없이 서로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없... 잠깐, 하나 있는데 설마?
"그래, 공평하게 결투를 하자고"
"...미친거 아니냐?"
애초에 비전투직 직업이면서 나랑 결투를 하겠다고?
뭐 물론 나도 저 녀석에게 칼 한대 맞으면 죽을 정도긴 하지만, 적어도 나는 회피기술이라도 있지...
저 녀석이 뱃살로 탱커 짓 하는 스킬을 배운 건 아닐테고, 대체 무슨 속셈이지?
[벨라 님이 공정한 결투를 신청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당연히 나야 손해볼게 없긴 하지.
오히려 카운터로 저 녀석을 역으로 죽일 수도 있는 기회다.
반쯤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나는 수락을 했고, 그 순간부터 녀석의 입가에 노골적인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결투가 시작됩니다. 행운의 여신은 승자를 향해 미소짓습니다]
"...뭐야 이게?"
결투라길래 당연히 나는 콜로세움같은 스타디움을 배경으로 넓은 싸움터로 이동할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웬 테이블이랑 플레잉카드지?
설마...
"역시 멍청하구나. 전투직이랑 생산직이 싸움으로 결투할 리가 없잖아? 공정하게 앉아서 품격있게 해야지"
"무슨 벌레가 새 잡아먹는 소리야..."
이건 오히려 너한테만 유리한 싸움이잖아!
당했다.
저 녀석이 정정당당하게 싸움을 걸 리가 없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 생산직과 결투할 일이 없었으니 이런 식으로 규칙이 적용된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고.
심지어 저 녀석, 대놓고 2차 전직을 겜블러(도박꾼)로 한 놈이다.
도박에서 가장 중요한 '확률'을 담당하는 행운 스탯.
그 행운 스탯이 높은 사람과 스탯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 승자는 누가봐도 뻔했다.
그런 줄 알았다.
[행운의 여신이 승부를 예측하지 못해 확률의 신이 게임을 주도합니다]
[결투 중에는 행운 스탯이 효력을 발휘하지 않습니다. 게임은 '온전히' 확률로만 진행됩니다]
"무, 무슨 이런 미친...!"
"됐다 시발!"
이렇게 된다면 승패는 9.99 : 0.01이 아닌 완벽한 5 : 5 확률이 된다.
행운 스탯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온전하 패가 나올 확률로만, 진정한 '도박'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완전히 이긴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올라온 것만 해도 충분한 기회였다.
"행운 스탯 믿고 깝쳤지? 이래도 그리 자신만만한가 볼까?"
'공정한' 결투가 시작되었다.
* * *
게임규칙은 블랙잭 3판 2선승제.
카드를 두장 씩 받고 뽑아 카드에 적힌 숫자의 합이 먼저 21에 가까워지는 사람이 이긴다.
단, 숫자의 합이 22를 넘어갈 경우 버스트, 즉 자동패배다.
카드 분배는 시스템이 해준다.
딜러도 배팅금도 없는 순수한 카드게임이다.
배팅금이라 하면, 여기 달린 내 목숨이랄까.
"시작하지"
카드 네 장이 공중에 떠올라 각각 두개씩 나와 벨라에게 나타났다.
나에겐 9와 4, 녀석에겐 7과 5.
"힛(HIT)"
비록 지금은 내가 21에 더 가깝긴 하지만, 녀석이 한 장 더 뽑았다가 9 이하의 카드가 나올 확률이 너무 높다.
시스템이 가져다 준 내게 세번째 카드는 클로버 6. 합쳐서 19.
괜히 욕심부려서 더 뽑았다가 4이상만 나오면 폭망이기에 나는 이쯤에서 멈췄다.
"스탠드!"
그래, 이 정도면 안정권...
"...!"
벨라가 세번째로 뽑은 카드는 하트 8.
합쳐서 20이다.
[1라운드 승자 : 벨라]
[곧 2라운드가 시작됩니다]
"후훗, 아무리 행운 스탯이 없다고 해도 내 실력을 얕보지 마라. 그런다고 네가 이길 수 있다는 것도 아냐"
처음엔 잠시 당황했지만 녀석도 슬슬 페이스를 되찾은 듯 하다.
제길, 이러면 안되는데.
두번째 판에 나와 벨라에게 나눠진 카드는 각각 9와 8, 8과 6였다.
당연히 내게 불리한 판이었지만 다행히 첫 턴에 나는 에이스(A)를 뽑았다.
기본적으로 에이스는 1과 11중에 자신에게 유리한 숫자로 적용된다.
이 경우엔 당연히 1이었고, 운없게도 벨라가 9를 뽑아 버스트가 되었다.
"이런 젠장!"
"어이, 왜 그래. 품격있게 하자면서"
씩씩거리며 테이블을 뒤엎을 기세인 벨라를 향해 나는 실소를 지었다.
스코어는 1대1.
승부는 지금부터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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