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당한 침입 -->
46화
"네, 좋습니다! 얼마든지 와서 살펴보고 가시죠"
"...?"
들여보내준다고?
설마 이거, 진짜 남향왕국에서 혹한기 훈련 온 부대인거 아니겠지?
아무리 최고기밀권한을 가지고 있다 해도 모든 사정을 다 아는 건 아니니까...
"그럼, 안내해주시죠"
"물론입니다. 따라오세요"
일단 시설 안에 따라가보기로 했다.
이래놓고 들어가자마자 태세변환해서 나 죽이는 거 아니겠지?
설령 그렇다고 해도 뭐, 그림자도약으로 잘 빠져나오면 되겠지.
적어도 시설 쪽으로 가는 도중엔 날 죽일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래도 긴장끈을 놓긴 이르다.
눈으로 보이던 것과 달리 천막은 생각보다 멀리있었다.
기후의 방해를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략 20분 정도 걸렸고, 천막 건물이 내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는 걸 깨달았다.
"와 이건 뭐... 대대 하나 통째로 데려왔나?"
남극탐사기지를 모아놨다고 해도 부족하지 않을 규모다.
역시, 이정도로 많은 군대가 남향왕국에서 올라왔다는 건 말이 안돼.
그래도 일단 아무 의심도 안하는 척 남자를 따라갔다.
바깥에 나와 훈련하는 군인들의 모습을 보니 갑자기 안쓰러워진다.
정말 내가 혹한기 했을땐 춥다는 생각밖에 안들었는데, 쟤네를 보면 '존나 오지게 춥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한겨울의 시베리아 같은 기온에서 맨몸으로 훈련을 하고 있다니.
면역포션이 있는 세계라 그런지 훨씬 빡세게 굴리는구나.
아니 아무리 포션이 있어도 저건 좀 아니다 싶을 정돈데.
"여기서부턴 제가 알아서 돌아다녀보도록 하죠"
"네, 알겠습니다!"
이런다고 해서 나에 대한 주시를 멈추진 않을 것이다. 몰래 따라오거나 무슨수를 써두었겠지.
이들이 남향왕국의 군대가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무슨 자신감으로 내게 문을 열어준거지?
단순히 자신들이 남향왕국 군대가 아니라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아니면 들여보내서 전부 보여줘도 상관이 없다는 건가?
뭐든지 간에 알아보기 위해서 나는 계속 주변을 돌아다녔다.
지금까지 본 것만으로는 전혀 단서가 없다.
숨겨진 무언가나 그런 것도 안 보이고 그냥 평범한 혹한기 훈련의 모습밖에 안보인다.
...갑자기 왜 눈물이 나오지.
바깥 뿐만 아니라 천막 안쪽도 살펴보았지만 역시 허탕이었다.
첫번째 천막은 식당이었고, 두번째는 무기고.
세번째는 병사들 옷갈아입고 있어서 열었다가 칼빵 맞을뻔 했다.
"후으..."
왜 이리 되는 일이 없는 거야!!!
몇달동안 범인 못 잡은 탐정이 된 기분이다.
좀 있으면 스트레스성 탈모가 생길 것만 같다.
설마 사전에 내 탈모를 유도해 정신력 및 사기를 낮춘 뒤 조용히 없애려는 건가?!
...어떡해, 나 그새 미쳤나봐.
어느샌가부터 눈이 붉게 충혈된 채 중요한 단서가 될 만한 것들만 찾아 천막들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주변에서 슬슬 날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다.
10분이 넘게 말도 없이 건물들만 돌아다녔고, 이제 남은 건 단 한 곳뿐이었다.
"제발..."
이곳에선 뭔가를 알아낼 수 있길 빌자.
안쪽에는 사람이 없었고, 나는 조용히 천막 안으로 들어가 내부를 살폈다.
숙소는 확실히 아니고, 무기고나 주방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정확하게 뭐를 위해 만들어진 곳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 수상했다.
"저건 뭐지?"
실험기구로 보이는 여러 물체들 사이에 웬 두꺼운 책이 펼쳐져있었다.
페이지 안쪽으로는 마법진 문양과 함께 영어와 비슷한 글자가 쓰여져 있었는데, 발음하기가 꽤 어려웠다.
"뭐라고 써있는 거야. 아...에자...젤...흐억!"
순간, 책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나와 나를 집어삼켰고, 섬광이 가셔 시야가 돌아올 무렵 나는 전혀 다른 공간에 이동해있었다.
그래, 이거지!
이제 이 망할 천막들이 무엇을 위장한 것인지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무렵.
"여긴 제한구역입니다. 그냥 순순히 돌아갔으면 별 일 없었을텐데, 굳이 호기심으로 죽음을 자처하시는군요"
"...개새끼"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와 내 몸을 궤뚫었고, 내 캐릭터는 그대로 사망 상태가 되었다.
* * *
내가 원래 이 위험천만한 여행을 자처했던 이유는, 그 위험들이 별로 큰 리스크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최악의 경우라 해봤자 한 번 사망하는 것 뿐이고, 다시 스폰 포인트에서 부활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이때 내가 간과했던 것이 있었다.
원래 플레이어가 사망할 경우 리스폰 포인트는 자신이 사망한 마을로 텔레포트를 했을 때 나오는 지점, 일명 텔레포트 포인트에 지정된다.
그러나 만약 사망한 지역에 텔레포트 포인트가 없을 경우, 죽었던 지점에서 그대로 다시 부활하게 되는 것이다.
한 번 죽는다 하더라도 이 시설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당당하게 시설을 볼 수 있게 해드린다면 의심을 접으실 줄 알았는데"
"그걸 가지고 '당당하게'라고 할 수는 없지 않냐? 처음에 보니까 딱봐도 엄청 당황하더만"
뭐 그가 얼마나 완벽하게 날 속이려 했던 간에, 나는 의심을 했고 그 결과 어디인지도 모를 감방 안에 갇혀있다.
"텔레포트가 닿지 않는 혹한 지방이 이런 이점을 안겨주는 군요. 아무리 당신이 이방인이고 끈임없이 부활할지언정 이곳을 빠져나가긴 불가능합니다"
"훗, 과연 그럴까?"
나는 바로 앞에서 쫑알대고 있는 남자의 상태창을 소환해보았다.
NPC라 그런지 많은 정보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저 녀석의 HP는 500 정도.
플레이어가 아닌 NPC 병사 치고는 꽤 높은 편이었다.
그래도 그 만큼 방어력이 높겠지만, 영혼의 울림이 발동된다면 그딴거 다 필요 없지.
최대 HP가 500이라면 40타 데미지인 625에서부터 영혼의 울림이 발동된다.
그리고 내 앞에는 전혀 어색하지 않게 스택을 쌓을 수 있는 훌륭한 대상이 있었다.
깡! 깡! 깡!
"...뭐하시는 겁니까? 허술해보여도 무려 오리할콘으로 만들어진 창살, 당신이 얼마나 강하게 부수려 하여도 그 에너지는 전부 흡수될 것입니다"
아무래도 저새끼는 내가 이 낡은 검으로 철창을 깨부수고 탈출하는 병신짓을 시도하려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그거 알아? 여기서 나가는 것쯤은 말이야..."
40타째.
"언제든지 할 수 있다고"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림자 도약으로 철창을 빠져나와 남자 뒤에 섰다.
"무, 무슨... 크헉!"
생명이 끊어지기 직전, 남자는 나와 만난 뒤 그 어느때보다도 당황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