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이탄의 기억 -->
34화
이젠 정말 시간이 없다.
거인은 완전히 무개중심을 잃고 쓰러지고 있었고, 그 밑에 누워있는 승현이는 여전히 마비상태.
그렇다고 저대로 깔려 죽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빠르게 승현이에게 달려갔다.
쿵!
다행히 거인한테 깔리 직전 슬라이딩 하다시피 달려가 승현이의 손을 잡을 수 있었고, 그 즉시 유화술로 빠져나왔다.
"히익! 여, 여긴..."
"나도 알아!!!"
문제는, 유화술이 무조건 대상의 반대편에서 다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점.
뒤쪽 밑에서 사용했으니 거인의 앞쪽 위에서 다시 나타났다.
3층빌라 정도 되는 거인의 키 기준으로 위에서 말이다.
"으아아아!!!!"
아니 무슨 쓰러지고 있으면 그 높이 기준으로 정해야지, 서 있을 때 기준으로 한참 위에 보내버리면 어쩌자는 건데?!
이 정도면 손가락으로 툭 치면 죽어버릴 정도의 HP를 가진 나 뿐만이 아니라 승현이도 낙하데미지로 사망한다.
빨리, 이대로 추락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을거야.
"아! 저거다!"
문득 앞쪽에 있는 거인의 풍차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저기라면...
"꽉잡아!"
나는 승현이의 손을 꽉 쥔채, 풍차의 꼭대기를 향해 그림자 도약을 시전했다.
몸이 순식간에 위로 붕 뜨는 것을 느꼈고, 꼭대기에 도착했을 땐 모든 낙하속도가 초기화된 후였다.
"흐아, 살았다"
"그런데 형... 여기서 어떻게 내려가요?"
"...그러게?"
올라올때까지만 해도 정말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는 데, 내려갈 방법이 없다.
떨어질때 그림자 도약을 위로 사용한다면 속도를 줄일수야 있겠지만, 그 정도로는 택도 없다.
한마디로 망한거다.
"후우, 일단 저 놈부터 잡고 보자. 활이랑 화살은 충분히 있으니까, 아마도 저 녀석이 풍차를 부실 생각이 아니라면 잡을 수는 있을 거야"
"그럼 전 뭘 할까요?"
"내가 계속 때릴 동안 여기서 어떻게 내려갈지 생각해보는게 어때?"
"음, 좋아요"
그렇게 승현이는 풍차바람을 맞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고, 나는 저절로 튀어나오려는 쌍욕을 애써 억누르며 활을 꺼냈다.
"후우 일단 빨리 잡자"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화살은 남향왕국 무기창고에서 가져온 인챈트 화살(따발화살이라 부르기로 했다).
애초에 지금은 쓰러져서 일어나고 있는 상태니, 맞추기도 훨씬 수월했다.
타다다다닥. 타다다다닥.
한발 한발 쏠 때마다 세 발로 나뉘어지니 스택도 훨씬 수월하게 쌓인다.
가끔가다가 네 발이 나가는 혼종이 있긴 했지만, 오히려 좋은 거지 뭐.
어쨌든 그렇게 프리딜을 넣다 보니, 10초에 벌써 60스택이 됐다.
벌써 거인의 HP는 반도 안 남은 상태.
너무나도 완벽한 계획처럼 보였지만, 발목에 부상을 입은 거인이 영원히 쓰러져 있지는 않을 터였다.
70스택까지 쌓였을 때, 마침내 거인이 다시 일어났다.
상당히 오래 쓰러진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상 20초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때, 승현이도 갑자기 눈을 떴다.
"수아는? 형, 수아 어딨었죠?!"
"아까 분명 뒤 쪽에 서 있었는데... 저깄다!"
그녀는 멀찌감찌 뒤에서 겁에 질린 표정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가 걱정되어 도와주고 싶긴 하겠지만, 가서 죽어주었다가 오히려 방해만 될까봐 섣불리 다가오지 못하는 것이다.
저정도 거리에선 버프 스킬조차 걸어줄 수 없겠지.
문제는, 다시 일어선 거인이 곧장 그녀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아를 도와줘야되요!"
"나도 알아. 나한테 계획이 하나 떠올랐어"
편하게 활시위만 당기고 있을땐 전혀 생각안나다가 이제서야 뭔가가 떠올랐다.
우선 거인의 등 뒤에 올라탄다.
그리고 나서 거인을 최대한 빠르게 공격해 HP를 1로 만들어 놓은 다음, 바로 땅으로 뛰어 내리며 발이 닿기 직전에 단검을 던져 처치를 한다면...
"그 즉시 레벨업으로 무적상태가 되고, 우린 낙하데미지 없이 안전하게 땅에 착지하는 거지"
"오오, 가능할 것 같아요"
"손 꽉 잡고 있어. 계속 이러고 있으면 첫 단계서부터 틀어지게 돼."
한 손으로 승현이를 잡은 채 바로 그림자 도약과 유화술로 거인에게 따라붙었다.
툭.
어깨는 너무 좁고, 마땅히 착지할 때가 없어 그냥 팔에 매달리기로 했다.
역시 거인은 우리가 매달린 것을 바로 알아차렸고, 온몸을 뒤틀고 팔을 휘저으며 우리를 떨어뜨릴려 했다.
"으윽!"
"절대 팔을 놓지마! HP 반도 안 남았으니까 계속 때리면 잡을 수 있어!"
한 손으로는 거인의 팔을 붙잡은 채, 반댓손으로는 단검을 거꾸로 잡아 끈임없이 칼질했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스택이 쌓였고, 5대 쯤 때렸을때...
"으악!"
"젠장!"
거인은 오른팔로 우리를 '잡아' 떼어내는 현명한 방법을 사용했다!
완전히 제압당한채 거인의 손에 놀아났고, 그러다가가 결국 녀석은 우리를 땅바닥으로 내던져 버렸다.
어떡하지? 유화술과 그림자 도약은 아직 쿨타임이고 한 대로 잡기엔 아직 HP가 너무 많이 남았다.
80타 데미지라면 잡을 수 있을 것도 같은ㄷ... 잠깐! 그 방법이 있구나!
"정신차려 임승현!"
"...ㄴ, 네! 넵! 정신 똑바로 차릴게요!"
나는 단검을 집어넣고 대신 활과 따발화살을 꺼냈다.
아직, 아직은 아니야...
그리고 지면으로부터 대략 10미터 정도 쯤 남았을때.
"지금이다!"
활시위로부터 두 발의 화살이 거인을 향해 날아갔다.
끝내 거인에게 닿을 때 쯔음엔 6발로 쪼개져 있었고, 이것으로 81타 째가 되어 녀석의 HP는 0이 되었다.
[히든 보스 : 미개척지의 거인 농부를 처치하셨습니다!]
[일부 종족이 당신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냅니다]
[일부 종족이 당신에게 호감을 표시합니다]
[레벨이 오르셨습니다]
[레벨이 오르셨습니다]
됐다!
정확히 땅에 부딪히기 직전의 타이밍에 거인은 쓰러졌고, 레벨업을 통해 우린 사뿐히 땅에 착지할 수 있었다.
"오빠!"
"수아야! 안 다쳤어!"
평소엔 그리 티격태격 하더니, 그래도 서로 걱정은 됐나 보구나.
"흐아. 잡기 힘들었다"
"결국 이번에도 형이 다 했네요..."
"야. 그런 말 하지 말라 했지 내가?"
이제 보스도 잡았고, 레이드도 끝났겠다. 다시 마을로 돌아갈 시간이다.
그런데... 결계가 해제 되지 않고 있다.
"이게 지금 뭐하자는 거지? 혹시 버그인가?"
"이상하네. 그러고보니, 던전을 클리어했다는 메세지도 안 나왔어요!"
보스몬스터를 잡았고 처치 메세지도 떴는데, 던전클리어 메세지가 나타나지 않았다.
뭔가가 더 있다는 뜻. 던전을 클리어하기 위해선 단순히 보스를 잡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요구된다는 의미였다.
혹시 또다른 잡몹들을 처리해야 되는 건가?
그때, 갑자기 쓰러진 거인의 눈이 번쩍 빛났다.
"히익! 이거 뭐야?!"
얘 죽은 거 아니었어?
눈 부분에 있던 붉은 점이 조금 씩 갈라지더니, 이내 쨍그랑 하고 깨지며 안쪽에 있던 '진짜' 눈이 드러났다.
평범한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평범한 눈동자 말이다.
가까이서 보니 그렇게 아름다운 게 없었다.
그러나 감상도 잠시.
눈가에 나오는 빛은 점점 밝아져만 갔고, 끝내 그 빛은 우리를 집어 삼켜버렸다.
이때까지도 날씨는 흐리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