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이탄의 기억 -->
33화
"하 진짜, 다짜고짜 쫓아내버리면 뭐하자는 거야?"
클리어도 다 했고 이제 쉴테니 빨리 꺼지라는 의미인건가?
그 초급 수련장의 교관이라는 남자, 썩 멀쩡한 NPC로 보이지는 않았다.
"형, 어딨었어요! 몇 시간째 건물 안에서 안 나오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아까부터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었던 거냐?"
"당연하지. 아니 그래도 오빠가 갑기 사라졌는데 우리만 편하게 여관 가있을 수가 있어?"
"수아 너는 방금전까지 여관에서 자다 왔잖아"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무리 걱정됐다 해도 그렇지, 그 시간 내내 이 문 앞에서 계속 날 기다렸다니... 심지어 마을 순찰대까지 불러놓고...
"대단하다 너희도 진짜..."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있는 낡은 건물 아니, 초급 수련장 앞에서 나는 작게 실소를 지었다.
* * *
"우와 그럼, 거기가 초급 수련장이었다고요? 그럼 형은 어떻게 됐어요?"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애초에 클리어 못하면 나갈 수도 없게 돼있었고, 클리어했으니까 나왔지"
"오오오! 입문 수련장 클리어했다는 사람들은 워랜진에서 몇 번 봤었는데, 초급은 정말 형이 처음이에요!"
"사실 그게 좀 빡세긴 하더라..."
기본 HP가 50만에 웬만한 공격력은 쥐뿔만큼도 안 들어오니 클리어 하는 사람이 적은 게 당연하지.
적은 게 아니라 희귀하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음, 그럼 이번에는 다시 보스 레이드인건가?"
"네. 아마 히든 던전일거에요"
어쨌든 설정상 미개척지이니, 공식적인 정보상들 사이에선 이곳에 관련된 정보가 많이 오가지 않는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보통 직접 던전을 찾아 헤메는 게 태반인데, 우리 유능한 승현이가 어떻게 또 정보를 구해온 것이다.
"마을 여관 중심으로 나침반 265 방향이랬으니까, 아마 저 쪽으로 가면 될 거에요"
숲속인가.
뭐, 여기는 거의 전체가 마을 아니면 숲이니까.
"거기가 어떻게 생겼나도 했지?"
"농장이요. 정보에 따르면, 고대 타이탄 종족이 평화롭게 농사를 짓던 곳이래요"
타이탄, 마법에 필적하는 기술력을 지녔으며, '거인'이라고도 불리는 고대의 종족.
내가 한참전에 클리어했던 거인의 대장간이라던지, 아니면 현재 남향왕국에서 개발중인 병기에 사용되는 기술도 전부 타이탄이었다.
기술력만 발전시킨 곳인 줄 알았는데 농사 같은 것도 지었다니!
여관에서 대충 휴식을 취한 뒤 우리는 아침 일찍 마을을 나섰다.
나침반을 든 승현이를 따라 한참 전부터 걷고 있는데...
"승현아, 정보 제대로 들은 거 맞지?"
"당연하죠... 좀 있으면 나와야 될 텐데"
"나오는 거야? 아니면 나왔으면 좋겠는거야?"
내 생각엔 아무래도 두번째인것 같...
"오빠, 저깄다! 큰 건물같은 게 보여!"
나오는 거였구나.
살짝 앞서가고 있던 수아의 외침에 우리는 바로 달려가 보았다.
높은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던 자연의 숲과는 어울리지 않는 평평한 논밭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봐도 한 번에 다 담기지 않을 정도로, 우리 기준으로는 마을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넓은 농경지.
비록 작물은 다 흙으로 돌아갔지만, 남아있는 넓이만으로도 충분히 그들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었다.
11세기 유럽 농장에서 가져온 듯한 풍차도 서 있었는데, 거인 타이탄의 농장인 만큼 그 크기도 어마어마했다.
아니 무슨 농장 풍차 크기가 아파트만한 건데?
그러나 한가한 생각들도 잠시.
갑자기 하늘이 폭풍우라도 몰아칠 듯 컴컴해졌다. 그러더니 이내 천둥번개와 수반된 비가 우리의 시야를 가렸다.
"으으, 갑자기 뭔데?"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는 게 딱 이말이었다.
보스 레이드를 하러 왔는데 날씨가 이리 악조건이면 당연히 사냥능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때마침, 낡고 곰팡이가 펴 톡 건드리면 떨어질 것 같은 문짝 사이로 거인이 나타났다.
[미개척지의 거인 농부가 출현했습니다!]
[보스룸 경계가 생성됩니다. 보스 레이드 진행중에는 경계 밖으로 벗어나실 수 없습니다]
우리 바로 뒤로 푸른색의 역장 같은 게 생겨났다. 오픈 월드에 존재하는 보스라 이렇게 임의로 보스룸을 만들어 놓은 듯 했다.
"근데 원래 거인이 저렇게 생겼나요? 그래도 어느정도는 사람 같을 줄 알았는데..."
"그러게 말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워랜드 유저는 거인, 즉 타이탄을 그저 '몸집만 큰 인간'으로 알고 있었다.
그때 잡았던 거인이야 수백년이 넘게 대장간에서만 살았으니 피부가 상한거라고 생각했지만...
대체 왜 농부가 잿더미를 가득 뒤집어 쓴 것처럼 까무잡잡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건데?
거기다가 이 녀석의 눈도 붉은 점처럼 되어 있어서, 무슨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처럼 생긴 게 지금 날씨와 딱 어울리는 모습이다.
"저 녀석의 무기는... 농기구인가?"
농기구도 무시 할 건 못 되었다.
이래뵈도 작물에다가 몇번 치면 툭툭 짤리도록 날카롭고 뾰족한 쇠붙이다.
농민봉기 때 괜히 사람들이 괭이나 쇠스랑을 휘두르고 다녔던 게 아니지.
거기다가 웬만한 창 만큼 리치도 길어서, 잘만 이용한다면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다.
"일단 수아는 뒤로 빠져있고, 승현이는 나랑 거인한테 바짝 붙자. 저 녀석 한테 우리는 벌레같은 존재니까, 그점을 최대한 활용해야돼"
"넵!"
저 타이탄과 우리의 체격 차이는 애초에 이걸 '체격차이'라고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엄청나다.
우리의 움직임이 상대적으로 날렵해진다는 소리지.
이 점을 활용해, 발 밑의 사각지대를 들락날락하며 녀석의 머리를 최대한 어지럽게 할 생각이었다.
'벌레 같은 존재'란 말도 그 뜻이다.
작전 구상도 전부 끝났겠다, 일말의 틈도 없이 우린 바로 거인에게 달려갔다.
거인 농부는 소리없이 우리에게 쇠스랑을 내리찍었지만, 그걸 그대로 맞아줄리가 없잖아.
쿵!
비록 리치는 길다 할 지라도, 그만큼 빈틈이 많아져 피하기가 수월했다. 거인의 쇠스랑은 우리 바로 뒤 쪽 맨땅에 꽂혔다.
"지금부터 사각지대다! 발목을 노려!"
원래 이렇게 거대한 보스(?)를 상대할 때는 아주 정석적인 방법이 있다.
먼저 공격을 회피하며 사각지대로 들어가고, 발목을 집중 가격해 무게중심을 무너뜨린다.
그래서 보스가 넘어지면, 그때부터 다시 일어날때까지 뚜까패고, 일어서면 다시 발목을 쳐 넘어뜨리고 반복.
몇몇 유저이자 네티즌들이 이름을 붙힌 일명 '소인국' 작전이다.
나와 승현이는 서로 갈라져서 양 발목을 맡았다.
그래도 아직 스택이 쌓이지 않았던 상황이다 보니 데미지가 안들어가서, 승현이가 때리던 오른발 쪽이 먼저 치명상을 입었다.
좋아, 이제 본격적으로 수월하게 작전을...
"으악!"
그 순간, 누구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거인이 땅에 꽂아두었던 쇠스랑을 들어 승현이를 사각지대 밖으로 쳐낸것이다.
회피할 기회도 엿보지 못한 채 그대로 뒤로 날아가 일시적으로 기절 상태가 되었다.
더 문제는, 정확히 그 위쪽으로 거인이 쓰러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 상태로 계속 상황이 진행된다면...
"승현아!"
그는 그대로 깔려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