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려가야 돼 -->
20화
대충 정황은 이렇다.
도적단 놈들이 전체를 상대로 결투가 열렸고, 내가 이겼다.
그랬더니, 이놈들이 단체로 날 새 대장으로 모시겠다면서 큰절을 해대고 있는 것이었다.
"부디 부족한 저희를 받들어주시옵소서!"
아니 무슨 사이비 종교집단도 아니고...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글쎄, 그냥 니들끼리 알아서 하라니까?"
"제발 저희를 이끌어주세요! 저희는 강한 리더가 필요합니다!"
이녀석들 아무래도, 놔줄 생각이 없는건가.
다 죽여버린다고 위협해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러기엔 너무 리스크가 컸다.
도적단에 속한 118명이 전부 PK일리도 없고, 만약에라도 PK가 아닌 사람을 죽일 경우 내가 PK가 되는 것이다.
뭐, 사실 얘네를 받아준다고 해서 내가 딱히 해가 될 건 없는데.
그래! 전투 할 때 몸빵 용으로 쓰자!
지금 같은 중저레벨 대에서야 거의 문제가 없었지만, 고레벨이 될 수록 난 1대 다수 식의 전투에서 불리해진다.
특히 상대가 충분히 머릿수만 된다면, 시간차 공격까지 사용될 수 있어 더욱 위험하다.
그럴 때 이 녀석들이 있다면...
"좋다. 내 특별히 너희를 내 부하로 받아들이도록 하마!"
"와아아아!"
대놓고 '부하'라는 칭호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들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방금전까지만 해도 도적단의 대장이었던 녀석에게 다가갔다.
"너, 이름이 뭐냐?"
"...에, 엔젤초라기라고 합니다..."
"이름이 왤케 길어. 그냥 엔초라고 부를게. 쫄지 말고 그냥 편하게 불러. 난 현우다."
"네, 넵! 현우 형님!"
참나, 그게 가장 편하게 부른거냐.
"근데 너네 도적단이라며. 그럼 도적단 이름이 있겠지?"
"아, 네. 활빈당 입니다!"
"..."
그럼 네가 홍길동이냐?
아, 아니지. 지금 여기 대장은 나구나.
"이런 허접을 갖다 놓고 활빈당은 개뿔. 차라리 골빈당이 낫겠다."
"오오! 그거 좋은데요? 대장님도 바뀌었겠다, 이 참에 이름도 골빈당으로 바꿀까요?"
"..."
아냐, 제발 하지마.
* * *
일단 엔초를 '부대장'이라는 역할로 맡겨둔 채, 워프 포탈 하나 사주고동굴을 떠나왔다.
언제든 포탈이 열리면 내가 도움이 필요한 거니까 바로 오라고 사전교육까지 시켜놨다.
좋아, 이정도면 최악의 상황에 대비라도 할 수 있겠지.
"다왔다. 여기구나."
내가 마차를 타고 가던 곳.
중앙왕국과 동향왕국 사이에는 거대한 정글이 있다.
강하고 희귀한 야생몬스터가 많이 출연해 고레벨 유저들의 레벨업을 목적으로 가끔씩 찾아가곤 하는 곳.
물론 내가 거기를 가겠다는 건 아니다.
단지 그 영향으로, 중앙왕국의 가장 동쪽에 있는 마을에선 야생몬스터의 대규모 침입이 가끔씩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때 PVE 공성 이벤트가 발생하고, 마을에 있던 모든 플레이어들은 자동으로 이벤트에 참가하게 된다.
마을 외곽에는 이를 대비한 높은 장벽이 있고, 이 벽을 끼고 몬스터들과 공성전을 펼치는 것이다.
그래.
나는 소식을 듣고 이벤트에 참가하기 위해 여기 온 것이었다.
이벤트에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초보자에겐 꽤 쏠쏠한 경험치가 있어서, 이미 마을에는 이벤트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참고로 이전의 내 캐릭터는 160레벨 대의 전사 캐릭터였다.
"그레이튼 마을에 온 걸 환영하네 모험가여. 보아하니 자넨 꽤 능숙해보이는 군"
만약 내가 쥐고 있는 초보자의 검을 봤다면 그런 말 못했겠지만, 장로는 아마도 방어구를 본 듯 했다.
"그래서, 이 마을엔 어쩐 일인가?"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죠 뭐. 소식 듣고 찾아왔습니다"
"아하, 그런 거였군. 행운을 비네. 자네같은 모험가들이 없었다면 이 마을은 진작에 불타버렸을 거야"
NPC들도 멍청이는 아닌 지라, 저 정도만 말해줘도 다 알아차렸다.
가끔보면 진짜 사람보다 눈치빠른 NPC들도 있던데...
"와 근데, 진짜 사람 많구나..."
대충 어림잡아도 300명은 될 것 같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데, 마을이 망할리가 있나.
이벤트에 나타나는 몬스터의 레벨과 숫자는 참가인원의 능력치에 비례한다.
강한 플레이어가 있으면 강한 몬스터가 오고, 약한 플레이어들이 있으면 상대적으로 약한 몹들이 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린 모두 시계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보가 맞다면 곧 온다. 10...9...8..."
7... 6... 5... 4... 3... 2...
1.
"왔다! 놈들이 나타났다!"
장벽 위에 서있던 감시병이 종을 울렸고, 마을은 순식간에 전투태세로 변했다.
"빨리 벽 위로 올라가세요!"
이 이벤트를 많이 해봤던 몇몇 사람들은 맨앞에 서서 가이드를 맡았다.
방식은 간단하다.
장벽 위로 올라가면 장비되어 있는 활과 화살, 대포 같은 것들을 이용해서 몬스터들의 진입을 막으면 된다.
생성된 몬스터가 전부 죽으면 이벤트 클리어.
몬스터들이 장벽을 넘어올 경우엔 마을이 함락되고 다음 마을에서 이벤트가 시작되는 식이다.
경험자들의 통솔 아래 우린 차례차례 장벽 위로 올라갔다.
"손재주 계열 스탯 있으신 분들은 대포 쪽으로 가시고, 나머지 분들은 그냥 활 쓰세요!"
활 못 쏘네 뭐네 할 순 없었다.
아무리 근접 딜러라고 하더라도 수백은 되는 몬스터들 밑으로 내려가서 혼자 싸울 순 없는 법이니까.
이제부턴 누가 지도할 것도 없이 활만 계속 쏴대면 되었다.
샤삭. 샤삭. 샥.
지금 이순간에도 매초마다 수십개의 화살이 날아가고 있었다.
멀리서 다수에게 화살을 쏠 경우 한 놈만 계속 때리는 게 불가능하므로, 평소라면 끝까지 1의 데미지도 주지 못했을 것이다.
35레벨이 되며 강화된 직업 패시브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패시브 : 나는 과학이다 Lv.2]
[한 대상을 공격하던 도중 다른 대상을 공격해도 연속공격 횟수가 초기화 되지 않습니다
연속공격 횟수에 비례에 초기화까지 걸리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다수를 상대로 한 싸움에서 한줄기 희망과도 같은 문구였다.
이젠 아무나 막 때려도 스택이 계속 쌓인다.
본의 아니게(?) 몰빵되어 굉장히 높은 민첩 스탯은 어마무시한 속사 속도라는 결과를 만들었다.
장벽 때문에 방해도 받지 않고, 엄청난 속도로 화살을 연사할 수 있었고, 나는 단 1분만에 80스택이나 올려버렸다.
그야말로 그 어떤 '몬스터'도 한 방이었다.
"뭐야, 왜 이렇게 빨리 죽는 건데?"
"저기 저 사람 좀 봐봐. 왜 저사람이 쏘는 화살은 다 원샷 원킬이지?"
이땐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쏴댔고, 주변의 시선이 온통 내게 고정되었다.활을 쏘는 것조차 잊고 나만 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단순간에 나는 너무 강해졌다.
결국, 지나치게 강한 내 능력치를 감지한 시스템이 몬스터를 변경했다.
[이벤트 참가자들의 평균 능력치가 대폭 강화되었습니다]
[새 능력치를 반영한 2차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망했다..."
지금, 80스택일 때의 데미지는 무려 78,125.
이 능력치를 반영한 몬스터라면, 최소 보스급 혹은 그 이상일 것이다.
"그 정도라면 단순히 벽 위에서 화살을 쏘는 것만으로는 안돼"
밖으로 나가서 직접 싸워야만 한다.
방금전까지 그게 미친짓이었고 내가 그걸 불가능한 행동으로 은유해 표현한 것도 알지만, 그게 이벤트를 클리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후우..."
심호흡 한 번 크게 한 뒤, 활을 버리고 검을 꺼냈다.
"잠깐! 당신 뭐하는 거에요! 미쳤어요?"
"2차 웨이브가 생긴 건 저 때문입니다! 나가서 전부 해치우고 올게요"
사실상 내가 해치워질 확률이 더 높았지만.
그 말을 끝으로 뒤에서 누가 뭐라 소리치든, 난 상관하지 않고 장벽 밑으로 내려갔다.
========== 작품 후기 ==========
도적단의 대장이 바뀌며 우리의 활빈당(?) 에게 새 이름을 지어주려고 합니다! 좋은 이름은 코멘트로 추천해주세요!
참고로 이름 나올 편까지 아무것도 안달리면 진짜 골빈당으로 갑니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