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나 추운(?) 설원에서 -->
14화
설인 괴수는 내가 예상하던 것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눈은 해괴하게 찢어지고, 등은 원시인처럼 굽은 채로 한손에 몽둥이 같은 둔기를 들고 있었다.
피부가 파란 트롤같은 모습이랄까?
눈보라가 강하게 몰아치는 산 정상에서, 우린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르르르르..."
갑자기 궁금해지는 건데, 왜 말 못하는 몬스터들은 대부분 키야악 아니면 그르르 거리는 걸까?
오크 같이 특유의 취익 소리를 내는 녀석들도 있지만, 나머지들은 소리만 듣고는 구분도 못할 정도로 울음소리가 비슷했다.
제작사도 어지간히 귀찮았던 건가...
"좋아, 설인괴수. 오늘 이자리에서 널 끝장내주겠어!"
...다시 들어도 오글거리는 대사를 내뱉은 것에 대해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딱히 큰 의미는 없었다. 그냥 한번 해보고 싶었을 뿐.
그렇지만 설인괴수는 내게 더 이상의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오글거리는 대사를 듣고 자기도 빡쳤는지, 광분한 표정으로 나에게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크!"
빠르다.
트롤 처럼 뚜벅뚜벅 뛰어다닐 것 같은 생김새와 달리 녀석은 굉장히 날렵하게 움직였다.
사실상 이번 공격도 보고 피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쫄아서 유화술을 사용한 것이었다.
"하아, 이 습관도 고쳐야 되는데"
처음보는 상대가 빠르게 공격해오면 나도 모르게 유화술을 빼버린다.
다음 5초동안, 나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떡하냐고?
어떡하긴 뭘 어떡해. 알아서 피해야지.
다행히도 유화술을 빼버린 덕분에(?) 직접 공격을 피해야 했고, 어느정도라도 대충 녀석의 패턴을 알 수 있었다.
가까이 접근한 뒤 빈틈을 노려 한대 때리고는 얍삽하게 빠진다.
물론 아직까지 한 대도 맞아주지 않았다.
그러고 있다보니, 내가 지금까지 전혀 공격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좀 빠르긴 해도 이녀석은 몬스터다. 잡으라고 있는 놈이라고..."
여기까지 날 올라오게 해준 고마운 녀석이지만, 방한복이 움직임에 너무 거슬렸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애초에 추위를 견디기 위해 만들어졌을 뿐, 민첩한 전투에 대비해 만들어진 게 아니니 말이다.
방어력이 조금 있긴 했지만, 그 정도로 저 몽둥이의 공격을 막기엔 택도 없었다.
추위에 오래 노출되면 바로 사망인데...
그럼 그전에 잡으면 되겠구나?
이론적으론 가능하다. 설인괴수의 체력과, 내 공격속도를 감안하면 그리 어려운 건 아니었다.
단지 매서운 눈보라 속에서도 시선을 딱 고정한 채로, 또 그 추위를 견디며 쉬지 않고 때려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잠시동안이라도 시야가 가려져 스택이 초기화 되는 순간 모든 게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그래, 내가 그걸 모르는 건 아니지.
굳이 더 시간 끌 필요도 없었다.
결정이 난 순간, 나는 방한복을 착용해제함과 동시에 검을 빼들었다.
패턴 상, 이제 녀석이 다시 달려올 차례다.
"크라아아!"
처음 들어올 때의 범위 공격은 가볍게 유화술로 피하고, 하나 둘 셋 넷.
엉덩이 쪽에서 묘한 간지러움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는 틈을 타 배쪽으로 돌아가서 다섯 여섯 일곱.
그곳을 건드릴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아무리 몬스터라고 해도 그건 좀 심하다 싶어 배를 때렸다.
그리고 공격에 실패한 설인괴수가 뒤로 빠질때 다시 유화술로 쫓아가서 여덟 아홉 열.
유화술은 적의 스킬과 공격을 모두 회피할 수 있는 스킬이지만, 그것 외에도 적의 바로 반대편에서 다시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딸피인 적이 도망갈 때 추노의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덕분에 녀석이 다시 덮칠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고.
처음 1분 정도는 순조롭게 흘러갔던 것 같다.
공격은 무난하게 회피하면서 꾸준히 스택을 쌓았고, 50타에 진동타격까지 쌓이자 엄청난 딜이 들어갔다.
문제는, 슬슬 내 몸이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경고! 극저온의 추위에 너무 오래 노출되셨습니다]
[곧 HP가 감소하기 시작하며, 질병질환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아니, 뭐가 이렇게 빨라?!"
생각해보면, 에베레스트 정상 정도 되는 곳에서 맨몸으로 이러고 있을 수 있는 것도 어찌보면 대단한 일이었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바람기사의 돌풍갑옷은 추위저항력 옵션이 없으니 사실상 맨몸이나 마찬가지다.
그나저나...
"얘 어디갔지?"
방금전까지 내 앞에서 싸우고 있던 설인괴수가 온데간데 없었다.
앞뒤좌우 다 둘러보았지만, 눈보라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멀리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럼 설마... 위?
"씨발"
쿵!
저 설인괴수 녀석의 점프력이 내 생각보다 굉장했던 건지, 아니면 근처에 더 높은 바위가 있던 건지는 모르겠다.
다행히도 즉각 반응해 유화술로 피했지만, 이미 내겐 절망적인 메세지가 나타났다.
[연속공격이 초기화 됩니다]
[극저온에 위험할 정도로 오래 노출되셨습니다 HP감소까지 남은 시간 15초]
녀석이 사라졌던 시간과, 유화술로 피한 뒤의 시간까지 더해져 스택이 초기화 돼버렸다.
더 심각한 건, 내가 죽기까지 15초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
[14]
[13]
[12]
이렇겐 안된다. 무슨 수라도 써야 했다.
[11]
[10]
[9]
HP가 얼마 남지 않은 건 저 녀석도 마찬가지인데...
[8]
[7]
[6]
나는 살짝 높게 점프해 2미터 정도 되어보이는 녀석과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는 진동타격까지 이용해, 공격력 1짜리 공격으로 녀석의 눈을 세게 그어버렸다.
"크아아아아!"
순식간에 장님이 된 녀석은 눈가를 부여잡고 울부짖었고, 덕분에 나는 잠시 숨 돌릴 틈을 벌 수 있었다.
[5]
[4]
[3]
[2]
"방한복 착용!"
[1]
[극저온의 추위에서 벗어나셨습니다.]
다행히도 HP가 닳기 직전에 방한복을 착용할 수 있었다.
물론 게임이니까 가능한 결과였다. 현실이었다면 방한복을 입었다고 해도 여전히 몸이 얼어있을테니까.
어쨌든 난 지금 살아있고, 녀석은 블라인드가 된 채 주변을 마구잡으로 파헤치고 있다.
광분 상태인 저 녀석에게 다가가 다시 때려서 스택을 쌓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반쯤 미친 상태로 주변을 죄다 휩쓸고 있으니, 정확히 날 때리려 할 때보다 공격범위가 늘어나 더 위험해진다.
무엇보다, 이젠 더 때릴 힘도 없고.
힘 안 들이고 저 딸피를 처리할 수 있을 방법을 생각하던 도중, 문득 가방에 넣어두었던 발열석이 떠올랐다.
대개 추운 지방의 몬스터들은 추위내성이 굉장히 높은 반면, 화염내성은 마이너스(-)단위이다.
그 말은 즉슨, 화염피해를 입을 경우 추가피해를 받는 다는 것.
그리고 지금 나에겐 만년설에서도 불을 피우고 야영할 수 있도록 발열석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미 한두번 사용하기도 했고, 정상이라 금방 식을 지도 모르지만, 그 잠깐이면 되었다.
나는 배낭에서 붉은 돌을 꺼내, 있는 힘껏 저 트롤에게 던졌다.
"크아아ㅏㅏ아!"
치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먹음직스러운 고기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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