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리털 빠진 놈 -->
8화.
“흐아, 대충 이 정도 자르면 되겠지.”
TV 같은 데서나 보던 정글 생존기를 직접 찍게 될 줄은 몰랐다.
게임 속이기야 하다만, 힘들고 노가다 뛰어야 되는 건 똑같았다.
유희 씨한테 얘기하던 건 어떻게 됐냐고?
그럼 이런 곳에서 당연히 승낙했지, 설마 거절했겠어?
어쨌든, 지금 나는 잠 잘 주거지를 만들고 있었다.
나도 에란젤로 가서 여관을 구할 생각을 했기 때문에 텐트 같은 게 없었다.
나야 아무리 좋은 장비를 맞춰도 공격력이 1이지만, 그렇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레벨이 오를수록 초보자의 검에게서 극심한 암을 느낀다고 한다.
그렇지만 전투 때만 아니라면, 초보자의 검은 매우 고퀄의 실생활용 칼이었다.
“무슨 나무기둥이 탁탁 썰리냐.”
검이 약한 게 아니라, 몬스터들의 가죽이 두꺼운 거였다.
시작 몬스터인 여우 그놈도 강화된 변종이 분명해.
쓸 만한 나무들을 잘라 와서, 덩굴 같은 걸로 적당히 엮어 움집 비슷하게 만든다.
...는 것이 내 목표였는데.
“아씨, 이거 왜 이렇게 안 묶여...”
이론적으로는 모든 게 착착 진행될 줄 알았지만, 나무 세 조각을 직각으로 묶는 것 조차 내겐 큰 시련이었다.
“이게 다 손재주 스탯이 없어서 그래. 대체 왜 민첩 밖에 없는 건데?”
사실 처량한 핑계고, 현실에서도 이런 거 잘 못한다.
“아직도 안됐어요?”
“네에, 이게 좀 힘드네요...”
“주세요. 이제부턴 제가 할게요.”
“아니에요. 아직 더 할 수 있...”
“제가 할 테니까 그냥 좀 쉬세요.”
왠지 ‘너한테 맡기면 도무지 안 끝날 것 같아. 그냥 내가 할 게’라고 한 듯 한 느낌이 들어, 나는 그녀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럼 그동안, 나는 섬 구경이나 할까?
지리지형도 알아둘 겸 섬 전체를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혹시라도 그 공룡 녀석들이 또 나타난다면, 내일 저녁감이 더 생기는 거지.
그런데, 이건 좀 심하지 않냐?
“이크!”
지금 내 앞에는 사흘 치 먹잇감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하루 세 끼니까, 총 아홉 마리를 한꺼번에 상대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한 마리 한 마리는 움직임이 둔했지만, 그 간격 사이사이로 다른 녀석들이 공격해오니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유화술 쿨타임 관리고 뭐고 그딴 거 없었다. 그냥 돌면 바로바로 사용해야 했다.
지금까지 1대 1 상황만 있다 보니 내가 모르고 있던 것이 있었다.
연속공격 스택은 한번이라도 다른 대상을 때릴 경우 완전히 초기화된다는 것이었다.
“젠장, 그놈이 다 그놈 같은 데 어떡하라고!!!!”
처음 다섯 놈 까지는 시선을 고정해서 겨우겨우 잡았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무리였다. 체력이 조금씩 바닥나면서 시선이 자꾸 흐트러졌다.
할 수 없이, 억지 적으로라도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을 하나씩 만들어야 했다.
좋아, 쟨 턱 쪼개진 놈. 쟤는 꼬리 짧은 놈. 쟤는 다리 긴 놈. 쟤는... 머리털 뽑힌 놈!
“순서대로 하나씩 잡자. 특징에 초점을 맞추는 거야.”
그러자, 정말 놀랍게도 녀석들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내 첫 번째 표적은 다리 긴 놈이었다.
다리가 긴 만큼 팔이 짧아 공격범위가 높았고, 밑으로 파고 들어가 때리기 수월했다.
그 다음으로는 턱 쪼개진 놈.
턱이 쪼개졌으니 그 사이로 공격을 하면 약점을 공략할 수 있...을거라 생각한 내가 멍청이였지.
턱이 쪼개진 건 그냥 생긴 모습일 뿐이었다.
그러니 만약님들이 이런 애들 만나면 절대 턱 때려볼라고 점프하거나 그런 짓 하지마세요. 체력낭비입니다.
꼬리 짧은 놈도 별 거 없었다.
오히려 피격범위가 줄어들어서 가끔 허공을 가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바로 한 대 때리면 스택 초기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드디어 남은 마지막 한 마리.
탈모 치료제 하나 사다주고 싶을 정도로 털이 벗겨진 ‘머리털 뽑힌 놈’이었다.
“너도 불쌍하구나... 그냥 편하게 끝내줄게.”
만약 널 먹게 되더라도, 특별히 머리 부분은 먹지 않고 남겨둘게. 천국에 가선 탈모에서 벗어나기를...
그렇게 짧은 장례(?)를 치러준 뒤, 공룡들의 고기를 주우려 했다.
그때.
“어라? 저건...”
내가 있는 곳 근처의 해변에서 많이 익숙한 빛이 보였다.
순간이동 텔레포트를 할 때 잔상으로 남는 반짝이는 연분홍빛.
그 빛이 가루 단위로 쪼개져 바닷가에서 빛나고 있었다.
설마...
나는 재빨리 해변으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텔레포트 때만 나오는 그 빛이 확실했다.
그 말은 즉슨,
“이 바닷가에 차원석이 있다는 거지.”
텔레포트를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핵심 아이템이었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워프 포탈’을 만들려면 특별한 마법부여가 필요했지만, 말 그대로 ‘순간이동’인 텔레포트를 위해서는 차원석을 여러 개 조합하면 되었다.
텔레포트가 더 좋은 건데 왜 워프가 더 어렵냐고?
워프가 더 쉽다. 차원석은 구하기가 더럽게 어렵거든.
마법 부여는 불가능해도, 만약 여기 차원석이 있다면, 조합을 통해 에란젤로 텔레포트가 가능할 것이다.
[아이템 : 차원석을 획득하셨습니다!]
“좋아, 일단 유희 씨에게 얘기해둬야겠어.”
나는 차원석과 공룡 고기를 인벤토리에 넣고는 돌아갔다.
방향을 외워둬서 거주지로 돌아오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돌아오셨어요?”
“유희 씨, 제가 알아낸 거 같아요.”
“네? 뭐를요?”
“중앙 대륙으로 돌아갈 방법. 여기를 벗어날 방법이요.”
* * *
“음, 그러니까. 이 섬 바닷가에 차원석이 스폰 된다는 거죠?”
“오늘은 한 개 밖에 못 가져왔지만, 내일 가서 찾아본다면 더 있을 거예요. 아직도 바닷가엔 연분홍빛이 남아있으니까요.”
“그나저나 이거, 은근 맛있네요?”
우린 불 앞에 앉아 공룡 고기를 뜯으면서 얘기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피가 철철 흐르는 비주얼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던 유희 씨도, 지금은 삼겹살 마냥 맛있게 먹는다.
“휴대용 텔레포터 하나 만드는 데 차원석 세 개가 필요하니, 총합 여섯 개가 필요하겠군요.”
꽤 많은 양이었다.
애초에 차원석이라는 게 그렇게 많이 발견되는 아이템이 아니니까.
그래도, 여기는 그만큼 많이 있을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혹시라도 차원석이 더 발견되면, 반씩 나눠서 파는 거 어때요?”
“오오, 좋아요. 혹시라도 홀수로 나오면, 한 개는 현우 씨가 가지세요.”“에이, 제가 어떻게 그걸 가져요. 필요없으니까 그냥 유희씨가 가져가세요.”
그렇게 우린 사이좋게 밤새 잡담이나 떨고 있었다.
하긴, 그땐 일이 그렇게 순조로울 줄만 알았지.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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